이은용의 장편소설 '그 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중학교 졸업식을 채 치르기 전에 필리핀으로 유학을 간 이진과 준희, 그리고 한국인 아빠와 필리핀인 엄마를 둔 현아의 이야기다.
이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묘사로, 여러 시련 뒤에 한 뼘 더 성장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고온 다습한 아열대성 기후인 필리핀에서는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는 상상할 수가 없다. 이처럼 모든 것이 낯선 환경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 그리움을 안고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가는 소녀들의 성장담이 조금은 아프게 펼쳐진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 이진(루시)은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방학에 필리핀으로 유학을 떠난다. 방학 기간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대입을 염두하고 떠나 온 유학길이 마냥 낯설고 두렵기만 하다. 대학 진학도, 그 이후 앞날에 대한 뚜렷한 확신도 없이 엄마 아빠의 부추김에 오게 된 필리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같은 나이의 준희(리사)와 함께라는 것이다.
부모님의 강요된 제안으로 필리핀에 온 이진과 달리 준희는 스스로 우겨서 온 경우이다. 준희는 필리핀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절실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래가 막막하기는 이진과 마찬가지. 둘은 한방을 쓰면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림자처럼 붙어 지낸다. 그러나 이진은 준희의 생각이 자신과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답답하고 힘든 유학 생활에서 뭔가 다른 돌파구를 찾으려는 이진과 달리, 준희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라는 필리핀에 대한 선입견은 준희에게 마음의 벽을 더욱 높이 쌓게 만든다.
우리는 쌍둥이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함께 다녔다. 내가 가면 준희도 가고, 준희가 가면 나도 갔다. 내가 하지 않는 일은 준희도 하지 않았다. 혼자가 아닌 둘이라는 사실은 걱정과 두려움을 반으로 덜어주었다. 하지만 가끔은 준희의 생각이 나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었다. (49쪽)
그런 둘 앞에 어느 날 현아가 등장하면서 보이지 않던 갈등이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현아는 어학원에서 말썽을 피우고 목사님 댁에 보내졌다가 돌아온 아이다. 아빠는 한국 사람이지만 엄마가 필리핀 사람이라 외모에서부터 눈에 띄는 현아를 준희는 처음부터 못마땅하게 여기고, 이진과의 사이에 현아가 끼어드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이진은 현아와 함께 원장 부부 몰래 어학원을 나와 자유의 바람을 맞는 것이 좋다. 그리고 오히려 현아를 헐뜯는 준희가 불편하다. 준희와 같은 중학교를 나온 한국 친구에게서 준희의 안 좋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던 이진은 처음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점점 자신이 보는 준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준희가 학교에서 필리핀 아이들과도 사이가 나빠지면서 이진과 준희의 거리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진다.
감옥을 빠져나가서 들이마셨던 공기. 그날 불었던 바람과 냄새와 모든 기운이 고스란히 기억났다. 매연을 마시며 탔던 트라이시클과 거리의 사람들. 내가 보았던 모든 풍경이 사진처럼 찍혀 앨범을 들추듯 하나하나 나타났다. 나를 향해 웃던 현아와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해서 불안해하던 준희.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었다. (158쪽)
준희가 자신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진은 선뜻 준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준희와 어긋날수록 이진은 자꾸만 더 준희를 피하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 날 준희가 아끼던 고양이 망고의 죽음이 찾아온다. 그러다 얼마 후,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준희는 시험을 치르는 날 학교에서 뛰쳐나간 후로 어학원에서 모습을 감춘다. 모두 준희를 잊은 듯 시간이 흐르고, 어학원에 새 학생들이 들어온 날 이진이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이끌리듯 준희의 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준희의 방이 아닌, 필리핀에 처음 왔을 때 준희와 함께 지냈던 지하 방에서 고양이처럼 변해버린 준희를 발견한다. 그 후 준희는 급히 한국으로 돌아가고, 이진은 준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크리스마스에 준희의 집을 찾아간다.
필리핀의 뜨거운 크리스마스를 겪으면서, 다음엔 꼭 둘이서 눈이 내리는 차가운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자고 약속했던 이진과 준희. 그들이 바라던 차가운 크리스마스는 필리핀에서의 그 여름의 크리스마스와 과연 다른 것이었을까? 함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던 필리핀 아이들은 그들과 정말 다를까? 이은용 작가는 이진과 준희의 낯선 이국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결국 똑같은 곳이었음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한국에서 수험생으로 살아가는 일과 녹록지 않은 유학 생활, 필리핀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준희와 준희를 좋지 않게 기억하는 한국 아이들, 어학원이 갑갑하기만 한 이진과 필리핀 생활이 너무 싫지만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준희, 그리고 그들이 기다리는 1년 중 딱 하루 크리스마스. 여름의 필리핀과 겨울의 한국은 그 계절의 차이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듯 보이지만 12월 25일은 어느 곳에서나 단 하루이듯, 바라보는 위치만 다를 뿐 결국은 모두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간, ‘누구’와 함께 하느냐, 하는 것이다. “생애 최고의 순간, 젊고 달콤한” 현재에 함께 춤을 추는 것, 그 자체의 아름다움 말이다. 그렇기에 크리스마스를 함께하자던 준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가는 이진의 여정은 중요하다. 아픈 성장통 끝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이 바로 그렇게 지금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말한 내용이 떠올랐다.
“컵을 아래쪽에서 보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지. 손잡이가 있는 반대 방향에서는 손잡이가 있는지도 모르는 거야.”
준희와 현아, 그리고 나는 각자의 방식대로 버티고 있었다. 어디에서 보든 결국 하나의 존재였는데, 그걸 몰랐다.
- 함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야. 다른 방향을 보았더라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서로가 본 걸 얘기했더라면, 그랬으면 알았겠지. 왜냐면…… 우리는 같은 걸 보고 있었으니까. (228~229쪽)
책 속으로
행복은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있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런 곳이 있기나 한 건지 그것조차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나를 위해 결정된 일이고 주변 사람들도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정작 나는 아무런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행복에 대해서도. (142쪽)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지금 아니면 안 되는 일만 생각하라고. 꼭 지금 해야 되는 일만 하라고. 열여덟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아파하는 마음을 갖는 건 열여덟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무 살에도, 그 이후에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열여덟은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없으니까. 사람들은 그걸 몰랐다.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166~167쪽)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니라고 말했다. 별거 아닌 일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시간, 상처들은 아무것도 아닌 걸까. 매일 크고 작은 일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 일들이 모두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별거 아닌 일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별거 아닌 일이라면 후회할 필요도 없고 되새김질 할 필요도 없지만, 사람들은 늘 지나간 시간을 곱씹으며 살았다.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별거’인 게 분명했다. (225쪽)
- 난 정말 몰랐어, 아무것도. 사랑이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고 우정을 지키는 법도 몰랐어. 그런 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나 혼자서도 잘할 줄 알았어. 하지만 저절로 알게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잖아. 어른이 된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니었어. 우리를 걱정해주는 어른들은 많지만 우리를 이해해주는 어른들은 없는 것처럼. 누군가가 조금만 알려주었더라면. 내가 조금만 일찍 깨달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와 눈을 맞추는가 싶더니 준희는 나를 지나쳐 먼 곳을 보았다.
- 더운 크리스마스도, 추운 크리스마스도, 하나라는 걸 이제야 알았어. 너무…… 늦은 걸까? (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