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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창시자, 자연과학은 정신과학과 불가분

책/학술

    양자역학의 창시자, 자연과학은 정신과학과 불가분

    신간 '부분과 전체'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부분과 전체'는 양자역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학문적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원자라는 미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혁명을 일으킨 양자역학의 발전에 참여한 수많은 천재들의 캐릭터와 일화가 밀도 높게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유머러스한 멘토 닐스 보어, 십대 때 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수학 천재 볼프강 파울리, 상대성이론으로 과학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아인슈타인, 플랑크 상수로 유명한 독일 과학계의 정신적 지주 막스 플랑크, 양자역학의 난제를 우아한 수학으로 정식화한 슈뢰딩거, '헬골란트의 빛'을 통해 '자연이 그 깊은 곳에서 펼쳐 놓은 충만한 수학적 구조들'을 바라보며 아득함을 느끼는 저자 하이젠베르크 등.

    20세기 과학의 최고의 천재들이 펼치는 토론과 대화, 새로운 이론에 대한 다양한 사고실험 등은 학문이라는 것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양자역학의 발전 과정뿐 아니라 이 책에는 과학에 관해서 못지않게 인간적, 철학적, 정치적인 다양한 문제들도 다뤄진다. 자연과학은 객관적 사실을 다루는 것으로 쉽게 생각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나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 자체가 관찰하는 주체와 무관한 물질적 객체라는 개념이 관념적 추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은 종교, 역사, 철학, 문학 등 인간 정신의 총체적인 활동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하이젠베르크는 강조한다.

    엄밀한 과학적 진술만을 신봉하고 과학적으로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진술을 부정하는 논리실증주의의 태도를 비판하는 하이젠베르크의 자세에서 독자들은 그가 과학지상주의라고 불리는 것과는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의 집필 의도 가운데 하나가 자연과학이 정신과학의 일반적인 문제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이젠베르크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기도 하다.

    양자역학의 발전은 정신과학의 기존의 개념들을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불확정성 원리는 칸트의 인과율에 대한 절대성을 흔들었으며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항변을 하게끔 만들고, 양자역학이 뉴턴 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처럼 물리학의 공리로 받아들여진 뒤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그로 하여금 양자역학을 잠정적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인간의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미시적 원자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은 이제 '이해한다'는 말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모든 학문에 던지고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학문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학문이 탄생한다고 했다. 이 당연하고도 자명한 전제를 책의 서두에서 강조하면서 이 책 전체를 그러한 사람들 간의 대화로 구성해 어떻게 학문 활동이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학문 활동뿐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현안이었던 히틀러 집권과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과 원자폭탄 개발에 대한 생각을 비롯해 종교와 철학과 역사와 정치에 대한 흥미진진하고 사려 깊은 이야기들은 과학적 사고와 복잡한 현실의 감동적인 만남을 선사한다.

    책 속으로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원자의 내부 구조를 명료하게 묘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즉 우리가 그 구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래도 언젠가는 우리가 원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될까요?” 보어는 잠시 주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요.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우선 ‘이해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먼저 배우게 될 겁니다.”

    나는 다시금 기존의 과학 및 사고의 토대가 되었던 생각들을 포기한다는 것이 참으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아인슈타인은 커다란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우리와 무관하게 확고한 법칙으로 돌아가는 객관적인 물리학을 연구하는 데 삶을 바쳐왔다. 이론물리학의 수학은 이런 객관적 세계를 모사하는 것이어야 했고, 그로써 이 세계의 미래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양자론은 원자에 이르러서는 공간과 시간 속에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이론물리학의 수학은 사실이 아니라 가능성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발로 디디고 있는 단단한 바닥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령 닐스 보어가 이제 양자론 해석에서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상보성의 개념은 철학 같은 정신과학에서는 결코 새로운 게 아니야. 명백하게 말로 정리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말이지. 하지만 그런 개념이 정확함을 표방했던 자연과학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결정적인 변화를 의미해. 상보성의 개념은 비로소 관찰 방식과 무관한 물질적 객체라는 개념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관념적인 추론이었음을 보여줘.”

    “수학에서 우리는 주장의 내용과 내면적으로 거리를 둘 수가 있어요. 결국 그 내용은 사고의 유희고, 우리는 거기에 관여하거나 관여하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나 종교는 우리 자신에 대한 문제예요.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거지요. 거기서 교리는 행동의 토대가 되고, 최소한 간접적으로는 실존의 토대가 돼요. 따라서 그냥 무관하게 밖에서 바라볼 수 없어요. 종교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인간 공동체 속의 우리 입장과 구분될 수 없고요.”

    나는 자연 속의 연관이 결국은 단순하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자연이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고,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사고 능력이 자연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전에 슈타른베르크 호숫가를 걸을 때 로베르트가 했던 말에 근거했다. 그때 로베르트는 자연을 이 모든 형태로 조성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 우리의 정신 구조, 즉 사고 능력의 구조 또한 만들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식사 후에 우리는 일을 분담했다. 닐스는 설거지를, 나는 화덕 청소를 맡았고, 다른 사람들을 나무를 패거나 다른 정리 작업을 했다. 고산 목장 부엌의 위생 수준이 도시의 부엌에 못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닐스는 이런 상황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설거지는 언어와 똑같군요. 물도 더럽고 행주도 더럽지만, 결국 이걸로 접시와 컵을 깨끗하게 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언어도 마찬가지예요. 개념이 불명확하고, 논리가 적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만 제한되지요.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자연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인간은 많은 면에서 동물보다 신체 능력이 뒤떨어져 있어요. 후각이 예민하지도 않고, 산을 산양처럼 빠르고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도 없어요. 하지만 공간적, 시간적으로 더 커다란 영역을 장악함으로써 이런 결점들을 상쇄할 수 있었어요. 여기서 언어의 발달은 아주 중요했어요. 언어, 그리고 그와 연결된 사고 능력은 다른 신체적 능력과 달리, 개인 안에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사이에서 발달하는 능력이니까요. 언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들 사이에 펼쳐진 그물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생각, 즉 인식 가능성을 가지고 이런 그물 속에 걸려 있는 것이고요.”

    “내가 보기에 히틀러는 외부 세계와의 모든 접촉을 잃어버렸어.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기껏해야 귀찮은 방해 정도로 느끼고 그냥 귀를 틀어막고 있다네. 그저 지난 14년간 정신적으로 부패되었으며, 이제는 그런 부패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할 따름이지.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스스로 굳게 믿고, 외부의 영향들은 모조리 차단해 버리면서, 폭력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현시키고 있을 뿐이야. 자신의 이념을 꼭 붙들고, 결코 이성적인 항의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는 이제 독일을 끔찍한 불행으로 인도할 거야.”

    “세상에는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어요. 우리 시대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이집트, 로마, 앵글로색슨 지역만 생각해봐도요-이런 사고방식이 기술, 경제, 정치에서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과학과 예술에서는 원칙적인 사고가 훨씬 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대담하게 구현되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였죠.”

    “독일에서 헤겔과 마르크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 음악에서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처럼 세상을 뒤바꾼 과학적 또는 예술적 업적이 탄생했다면, 그것은 절대성과의 관계 속에서, 시종일관 원칙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가능했어요. 절대성에 대한 추구가 형식, 즉 과학에서는 냉철하고 논리적 사고에, 음악에서는 화성학 법칙과 대위법에 복종할 때 말이에요. 이런 극도의 긴장 속에서만 진정한 힘이 펼쳐질 수 있어요. 절대성을 추구하다가 형식을 파괴하면 그 길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카오스로 이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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