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연구원도 채 모집되지 않은 지능정보기술연구원이 자리한 판교테크노밸리 글로벌 R&D센터 모습. 지난 8월 이사회에서 결정된 연구원장 연봉은 성과급 포함 3억에 달하는데다 이곳 한달 임대료만 1억 6천만원, 1년이면 19억 2천만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사진=AIRI 홈페이지 캡처)
이른바 'IT계 미르·K스포츠재단'이라 불리는 지능정보기술연구원(AIRI)의 특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정부가 기존 연구 기관과의 협약을 파기하고 예산을 빼내 수억원에 달하는 AIRI 원장 연봉과 수백억원 상당의 정부 과제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나타나 논란이 가중될 전망이다.
◇ 이제 갓 출범한 연구원에 원장 연봉 3억 '출자금 20%'…1년 임대료는 20억 상당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가 출자사 및 AIRI 이사들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AIRI 원장 연봉으로 1억 8000만원, 성과급까지 합쳐서 약 3억원을 지급하기로 지난 8월 23일 이사회에서 결정했다.
이는 7개 대기업 출자금 210억원 중 약 20%에 달하는 금액이다. 아직 AIRI에는 연구원들이 제대로 모집되지도 않았지만, 이 금액을 우선적으로 원장의 연봉 등에 쓰기로 정한 것이다.
AIRI 측은 "김진형 원장이 실제 IT업계에서 저명하기도 하고, 또 기업이 출자한 민간연구소인만큼 이사회 결정에 따른 것"이라며 전혀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가장 인공지능(AI) 분야에서 뛰어난 출연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원장의 경우 성과급까지 합쳐 1억 3000만원을 수령한다. 이와 비교하면 아직까지 연구 성과도 없고 검증도 안된, 이제 막 출발하는 연구원 원장에게는 "과도한 연봉"이라는 지적이다.
또 판교테크노밸리 글로벌 R&D 센터 5층, 전용 면적 350평에 달하는 AIRI 연구원은 한달 임대료만 1억 6000만원에 달한다. 1년이면 19억 2000만원을 지불해야 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유사한 AI 연구 기관들이 많은데도 이렇게 과도한 연봉과 임대료를 지불해가면서까지 반드시 AIRI가 출범해야만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서 그야말로 "기가 차다"는 입장이다.
정책위원회는 AIRI 설립을 추진한 미래부에 공식적인 회계 내역을 요구했지만 "원장의 연봉이나 성과급, 업무추진비 등은 민간연구소인 AIRI 인사운영에 관한 사항으로 제출할 수 없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책위원회 고위관계자는 "정부의 정책 과제를 연간 150억 원씩 5년간 750억 원을 수행하는 연구원이 단순히 민간기업이라는 이유로 운영의 투명성과 관련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 이미 국책기관·대기업·대학교에서 상당 기간 AI 연구 해오고 있어현재 국내 인공지능은 정부 예산이 직접 투입되는 ETRI, NIPA 부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정보통신기술진흥센(IITP), 한국뇌연구원 등에서도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특히 ETRI는 음성인지를 연구하는 자동통역인공지능연구센터와 시각인지를 담당하는 소프트웨어콘텐츠 연구소를 따로 분리, 연구 개발할만큼 AI 분야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대기업도 인공지능 연구 개발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네이버는 이미 4년 전 네이버랩스를 설립, 24일에는 인공지능 기반의 음성인식·로봇·자율주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각종 성과와 향후 과제를 발표하기도 했다.
SK텔레콤도 인공지능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게임에 국한되긴 하지만 엔씨소프트 역시 AI랩을 신설했다. 삼성·LG전자, 카카오 등 주요 대기업은 물론, 스타트업들도 작지만 활발한 AI 연구를 진행중이다.
대학교로는 카이스트를 비롯, 서울대, 포항공대, 숭실대 등 20여개 대학교에서 AI 및 로봇 등을 중심으로 관련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이들 기관 중에서 연구원들을 엄선해 특화된 AI 연구소를 만들거나 해당 기관에서 별도로 독립시켜서 정부 출연연 형식으로 연구원을 만드는 것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실제 네이버의 경우, 네이버랩스에서 AI 분야만을 위한 별도의 법인을 신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 10년 '계속 과제' 연구 기관 협약 파기해 예산 AIRI에 지원 '논란'더 심각한 것은 이미 유사한 연구 기관이 많은데도 또 하나의 민간연구소 AIRI를 신설하기 위해 기존에 확정돼있던 연구 기관을 배제하고 이 예산을 빼서 AIRI에 투입한 것이다. 올해 2월 미래부는 과제평가위원회를 열어 "실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2개 연구 기관에 대한 과제수행 협약을 해약하고 과제 자체를 폐기했다.
이는 더구나 ETRI와 계명대학교 산학협력단이 '10년간' 과제 수행 협약을 맺고 해오던 것이어서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ETRI는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자율지능형 지식·기기 협업 프레임 기술 개발'을, 계명대 산학협력단은 '환경 재난 재해의 조기 감지를 위한 다형 영상및 복합센서 데이터 기반의 분석예측 기술 개발'을 2014년부터 2023년까지 연구 개발을 약속한 '계속 과제'였다.
안정상 더불어민주당 방송통신 수석위원은 "과제 수행기간 10년 중 겨우 2~3년된 시점에서 '실적'을 따져 부진하다는 이유로 과제수행 협약을 해약하고 과제 자체를 폐기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갈 뿐더러 AIRI에 일감을 주기 위한 억지 예산 확보 방책으로 기존 과제수행자를 희생시켰다"고 주장했다.
미래부 측은 이에 대해 "막대한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모든 정부 과제들은 정기적으로 평가를 받고 합당한 절차를 거친다"면서 "두 과제 모두 10년 수행 기간의 계속 과제인 것은 맞지만 연구 개발에 다소 미흡한 면이 있고, 연구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해서, 또 과제 평가에 대한 구체적인 정량목표 설정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연차상대평가 결과 '중단'으로 판정했다"고 밝혔다.
ETRI는 국내 출연연 중 인공지능 과제를 가장 많이 수행하고 있는 곳으로 엑소브레인(Exobrain), 딥뷰(Deep View) 등 AI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 연구인력은 50명 미만으로 인력은 늘 부족하다.
이런 와중에 ETRI가 10년을 목표로 추진해오던 연구는 불과 2년 만에 '중단'됐다. AIRI를 지원하느라 ETRI 예산 또한 80억원에서 60억원으로 깎였다. 국가전략 프로젝트가 바뀌면서 수년간 공들여왔던 연구들이 엑소브레인이나 딥뷰처럼 유탄을 맞게 된 것이다.
과학계 한 관계자는 "이처럼 과제가 갑자기 중단되거나 예산이 줄어드는 등 미래가 불안한 상황에서 어떤 연구원도 새 과제에 의욕적으로 덤비지 못할 것"이라며 "그동안 해왔던 원천기술 개발의 싹을 자르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외형은 민간연구소이나 실제로는 정부가 계획을 세우고, 인위적으로 대기업의 자금을 끌어들여 만든 AIRI는 유사 연구소를 하나 더 만드는 옥상옥에 불과할뿐, AIRI 역시 성과가 불투명할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과거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009년 삼성전자, 현대차와 함께 차량용 반도체 공동연구를 추진했지만 큰 성과 없이 끝났다. 당시 참여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정권이 바뀌면 또다시 전시행정으로 끝날 것이란 우려의 시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