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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1987' 6월항쟁 숨은 주역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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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하다"…'1987' 6월항쟁 숨은 주역의 눈물

    [나의 '1987' ①] "자식 세대의 고통…우리 세대, 더 열심히 살았어야…"

    6월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이 흥행하면서 한국 사회가 걸어 온 민주화의 길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명식(62) 씨는 6월항쟁을 이끈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주화운동 관련 단체 연합기구)에서 조직국장으로 활약한 숨은 주역입니다. 그의 증언을 밑거름으로 유신시대부터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혁명까지 한국 민주주의 여정의 중요한 순간들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미안하다"…'1987' 6월항쟁 숨은 주역의 눈물
    ② "박정희 죽고 TV에 뜬 전두환, 싸움 직감했다"
    ③ "문재인 정부 실패하면 또 다른 MB 온다"
    <끝>

    영화 '1987'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최근 서울 상봉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이명식 씨는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말미에 결국 눈물을 떠뜨렸다. 지난 촛불혁명 당시 광장에서 마주쳤던,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내는 자식 세대의 현실을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지금 젊은 친구들의 참담함을 보면 고개를 못 들 정도입니다. 청년들에게 '헬조선 문제는 헬조선 안에서 풀어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 책임이 우리 세대에게 없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쌓이고 쌓인 모순이 촛불시민혁명으로 터졌다"며 설명을 이어가려 애썼지만, 흐르는 눈물과 떨리는 목소리로 인해 한동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지난 겨울 광장에서 벌어진 일은 누가, 어떤 단체가 주도하거나 이끈 것이 아니잖아요. 저 역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함께했는데, 내내 울면서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미안하고… 너무 고통스럽고… 초등학생들, 중학생들까지 나와서… 우리 세대가 더 열심히 살았어야 하는데… 그래야 아이들에게 저러한 고통을 안 주는 건데…."

    이 씨가 영화 '1987'을 보면서 든 생각도 이러한 성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는 "극중 아주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연희(김태리)는 자라면서 생긴 트라우마 탓에 사회적 참여에 상당히 부정적"이라며 "그러한 연희가 시대 상황으로 인해 마지막에 변화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평했다.

    "지난해가 6월항쟁 30주년이었죠. 환갑을 넘긴 제가 그 당시 30대 초반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한 세대가 지나간 겁니다. 우리 세대야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 영화를 보겠지만, 20·30대에게는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의 가치, 어떠한 역사 속에서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죠."

    그는 "사실 후배들, 지금 청년들을 보면 상당히 미안한 마음"이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세대의 경우 '청년들이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았죠. 지금 젊은이들은 누리는 것들이 더 많아졌을지 몰라도, 개별화·파편화를 강요하는 현실에서 사회적 발언·영향력이 위축됐다고 봅니다. 삶에 굉장히 짓눌려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세대가 꿈꿨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하는 자괴감과 미안함이 있어요.""

    ◇ "양보할 수 없던 항쟁의 버팀목…고문·용공조작 사건 향한 공분"

    6월항쟁을 이끈 '민통련'에서 조직국장을 지낸 이명식 씨(사진=이진욱 기자)

     

    이 씨가 대학에 들어간 1976년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유신체제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기승을 부리던 때다. 그가 다닌 고려대의 경우 유신체제에 대항하다가, 1975년 '긴급조치 7호'가 떨어지면서 1학년생 40여 명이 제적될 정도였다.

    "말 그대로 초토화였죠. 학내 서클이란 서클은 다 폐쇄됐고, 경찰·기관원들이 상주하면서 상상하기 힘든 억압을 가했어요. 분위기가 극도로 침체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법대를 다니던 저 역시 짓눌려 있었어요. '부모님 기대에 부응해 고시 공부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 한편으로 '유신헌법을 지키는 법관이 되는 게 옳은가'라는 회의가 들었죠."

    당대를 보낸 학생들은 누구나 겪어야 했던 선택의 기로에 이 씨 역시 직면했던 것이다. 1학년 겨울 방학을 거쳐 2학년 초까지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1979년 제적돼 감옥에 간 뒤로 1987년 6월항쟁까지 민주화운동으로 수차례 투옥되기에 이른다.

    그가 영화 '1987'을 보면서, 마음이 격앙됐던 극중 대목 역시 이러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이 씨는 "영화 속에서 박종철 열사 아버지가 유골을 뿌리며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라고 말하는 대목, 그리고 마지막에 엔딩곡으로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이 흐를 때 울컥했다"고 전했다.

    "선배들, 친구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고문이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을 거쳐 갔기 때문에 그곳이 어떠한 곳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앞서 소개됐던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당시 김근태 의장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고문 당했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 '남영동 1985'(2012)도 그랬고, 고문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보는 것이 상당히 괴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해 이 씨는 "당대 고문·용공조작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양보할 수 없는 버팀목이었다"고 표현했다.

    "1986년으로 가면서 정치권·재야·청년학생 운동 사이 이념적 쟁투가 심해지면서 내부 균열이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고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고문·용공조작 사건에 대한 공분이 있었기 때문이죠. 고(故) 김근태 선배가 1985년 남영동에서 고문 당했던 민청련 사건 때 '고문 및 용공조작저지 공동대책위원회'(고문공대위)가 만들어졌어요. 이듬해인 1986년에는 권인숙 양 부천 성고문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고문·용공조작 사건이 터집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고문공대위에 그야말로 정치·종교·재야·시민사회단체·변호사 등 사회 전 분야 인사들이 참여한다"며 "고문공대위는 굉장히 중요한 공동투쟁체로서 나중에 6월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로까지 연결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 "6월항쟁의 열매 '87년 체제', 한국 사회의 커다란 숙제가 됐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이한열 열사가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다른 학생의 품에 안겨 있다. (사진=이한열기념사업회·당시 로이터통신 정태원 기자 촬영)

     

    1987년 6월 9일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스러져 간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 사건으로 그해 6월항쟁은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이 씨는 이한열 열사에 대해 "정말 안타까운 희생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중상을 입은 한열 군이 숨을 거둔 것은 한참 뒤입니다. 직선제를 쟁취한 6·29선언 이후인 7월 9일 장례식을 치렀어요. 6월항쟁이 지속되는 내내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던 그가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있었죠. 국민들에게는 최루탄에 대한 강렬한 분노를 심어 줬고, 최루탄은 독재의 상징이 됐습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그해 6월 10일에서 6월 29일로 가면서 전국적인 대중집회를 한 차례 더 잡았다"며 "그것이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고 전했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뒤, 민통련을 비롯한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패배와 분열의 아픔을 겪으며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그리고 87년 체제는 올해로 31년째를 맞이했다.

    이 씨는 "민통련은 1989년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으로 재편되는데, 그곳에서 조직을 맡아 일하다가 1990년 재야운동에서 손을 뗐다"고 말했다.

    "그 뒤로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서 집안 사업을 이어받아 운영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 다시 서울에 와 김근태 선배와 일을 했어요. 김근태 선배는 이듬해인 1996년 총선으로 15대 국회에 들어갔는데, 그때 저는 초대 보좌관으로 함께했죠. 이후 1997년 대선에서 이긴 뒤 당시 국민회의에서 당 생활을 했어요.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뒤에는 총선 출마를 준비하다가 경선에서 실패했죠. (웃음) 지난해까지는 후배가 운영하는 언론사에 몸담았습니다."

    그는 "1976년 대학에 들어가 올해 62세가 되기까지 4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며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민청련에 들어간 1984년부터 민통련 활동을 이어간 1988년까지의 시기가 제 평생을 떠받치고 있었어요. '그런 기회가 다시 올까' 싶었는데, 지난해 촛불혁명으로 엄청난 감동을 맛봤습니다.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다음 세대와 함께 소중한 경험을 공유한 것이죠.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저 역시 어디에선가 작은 힘이나마 항상 보탤 작정입니다."

    "6월항쟁의 결과물인 87년 체제가 30년을 넘기면서 우리 사회의 커다란 숙제처럼 돼 버렸다"는 것이 이 씨의 진단이다.

    "어떻게 해야 더 나은 헌법으로 바꿀 수 있을까라는, 촛불혁명의 과제로 새 시대에 걸맞은 개헌이라는 화두가 던져진 셈이죠. 6월항쟁 당시 더 나은 헌법에 대한 고민을 갖고 실천했다면 지금 시점에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대목입니다."

    이 씨는 "촛불혁명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서 희망을 봤다"며 "그 자리에서 함께 촛불을 든 학생들은 뇌리에서 절대 지울 수 없는, 아주 강한 민주주의의 산 체험을 했다는 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한걸음을 뗀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세계에서 이렇게 살아 있는 국민들을 품은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이제는 수구세력의 헛소리가 더이상 먹히지 않는,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때로 돌아갈 수 없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촛불혁명에 동참한 젊은이들에게는 그 경험이 민주주의의 상식이 됐으니까요. 그들이 이제는 쉽게 돌이킬 수 없는 큰 발걸음을 내딛었으니까요."

    [나의 '1987' ②]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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