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이 글은 국내 발달장애 청년들의 자립에 필요한 '희망의 스마트팜' 조성을 위해 CBS와 푸르메재단이 함께 마련한 연속 기획입니다. ① '말아톤' 13년 후…고단한 삶속에 피워낸 작은 희망 ② 아이에게 한시도 눈을 못 뗀 19년…발달장애 엄마들 ③ 발달장애 청년 위한 일자리, 푸르메재단이 만듭니다 ④ "늙어가는 엄마는 점점 겁이 납니다, 아들 때문에" (계속) |
주간보호센터를 찾은 어머니 김혜숙 씨와 아들 신봉준 씨. 사진=꿈자람터장애인주간보호센터 제공
김혜숙(62) 씨는 젊을 적 사내방송 아나운서를 맡을 정도로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원이었다. 둘째인 (신)봉준(30) 씨를 낳은 뒤에도 속독법 강사로 재취업할 만큼 일 욕심이 많았다. 하지만 직업으로 자아 실현을 하겠다는 김 씨의 다짐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아이가 이상했다. 봉준 씨는 두 돌이 되도록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기다리면 차츰 나아질 거라 믿었다. 장애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부족한 시절이었다. 봉준 씨는 5살 되던 해에 병원에 가서 처음 진단을 받았다. 보통 아이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3년이 걸린 셈이다.
"자폐 1급이었어요. 그때부터 일을 그만두고 오로지 봉준이한테만 매달렸어요. 7년 동안 지하철로 서교동 집에서 사당동까지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유치원을 오갔어요. 집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봉준이 외에 다른 일은 거의 놓다시피 했어요."
잘 다니던 직장, 꿈꾸던 미래, 즐기던 취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이만 쳐다보며 지냈다. 아이가 나아질 거라는 기대, 마침내 홀로 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버텼다.
◇ 아이의 희망과 맞바꾼 엄마의 젊음
어머니 김혜숙 씨는 자신의 젊음과 아들 봉준이의 희망을 맞바꿨다. 사진=김혜숙 씨 제공
장애아에게 재활치료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하지만 국내 재활치료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보험이 적용되는 치료도 매우 한정적이다. 비장애아를 기준으로 진행하는 공교육만으로는 간단한 셈은 고사하고 단어 하나 익히는 것조차 힘겹다.
아이한테 장애가 있으면 부모 중 한 명은 일을 포기하고 아이를 돌봐야 한다. 그 역할은 거의 100% 엄마 몫이다. 월평균 100만원이 넘는 치료비가 들어도 절대 포기 못하는 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 홀로 남았을 때 한 사람 몫은 아니라도 1/2 몫 정도는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엄마의 피땀 어린 노력이 해피엔딩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발달장애인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먼지 없이 쾌적한' 좋은 일자리는 의사소통이 원활한 지체장애인이나 경증 발달장애인 차지다. 발달장애인 80% 가까이가 집에만 머무는 게 현실이고, 주간보호센터라도 갈 수 있으면 다행이다. 아이의 홀로서기를 목표로 쏟은 시간과 돈은 물론 엄마가 희생한 인생까지 물거품이 된다는 뜻이다.
◇ 매달 100만원이 넘는 치료비에 교실 청소까지
주간보호센터에서 미술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봉준 씨. 사진=꿈자람터장애인주간보호센터 제공
봉준 씨는 엄마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한글과 셈까지 익혀 일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김 씨는 자발적으로 교실 청소를 시작했다. 장애아를 입학시킨 엄마들 상당수가 그런 것처럼.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요."
아이의 장애가 엄마 탓이 아닌데, 김 씨는 다른 엄마들 앞에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오랜 세월 주장해온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낀다. 김 씨는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엄마들의 뒷모습에서 지난날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봉준 씨가 그럭저럭 다른 아이들과 수준을 맞추던 1학년 때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이 되자 격차가 벌어졌다. 이후 봉준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반학교 특수반을 다녔다.
김 씨는 엄마 말을 군말 없이 따르는 아들을 보면서 학교생활에 그런 대로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짝꿍이 꼬집었다"며 울면서 돌아온 날을 빼고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적 없었다.
"수영을 곧잘 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선배들 졸업식에서 난타 공연도 했어요. 볼링선수로 장애인체전에서 동메달도 땄고요. 직업적응검사에서 A를 받아 직업훈련기관으로 진학이 확정적이었어요."
◇ 물거품이 된 재활의 꿈, 그리고 지옥 같은 세월
김혜숙 씨는 "아들에게는 여전히 돌봄이 필요한데 엄마가 몸이 아파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말한다. 사진=꿈자람터장애인주간보호센터 제공
하지만 김 씨는 '그때 아이를 특수학교로 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후회한다. 고3이 된 후 아들이 다른 사람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신발을 자주 잃어버려서 선생님과 상의했더니 "아이들 장난"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럴 수 있다고 넘겼지만 이 무렵부터 봉준 씨는 온종일 소리지르며 엄마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표현력이 부족해 하소연할 수 없으니 그냥 입을 닫아버린 것 같아요."
누구도 감당 못하게 된 봉준 씨는 결국 입원했다. 의사는 이 증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발달장애인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어요. 불면증을 시작으로 성격이 예민해지면서 불안과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는 거예요. 스트레스가 심해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자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니까 어느 순간 폭발하는 겁니다. 이후 3년 동안 지옥 불구덩이 속에 있는 심정이었어요."
희망을 품고 성인기를 맞으려던 엄마의 바람은 산산조각 났다. 봉준 씨의 증상은 차츰 완화됐지만 직업훈련이 가능했던 3년 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미련을 못 버린 엄마와 직업훈련센터를 찾을 때마다 봉준 씨는 몸서리 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 일쑤였다.
◇ 이제 늙고 병든 엄마에게 희망이란봉준 씨가 갈 곳은 주간보호센터뿐이었다. 받아주는 곳이 있는 봉준 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주간보호센터가 필요한 장애인이 20만 명인데 전국 주간보호센터의 수용 가능 인원은 1만 명 정도예요. 게다가 한부모 가정이나 기초생활수급권자 가정이 우선입니다. 일반 가정의 장애인은 30명에서 많게는 100명 넘는 대기자를 앞에 두고 1년 넘게 기다려야 해요."
김 씨는 이와 같은 복지 서비스 불균형이 장애인을 돌보는 가정의 붕괴로 이어진다고 강조한다. 장애를 가진 자녀를 돌보는 책임을 나누어 짊어지는 사회, 자녀가 부모 없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안전망이 곧 희망이라면서.
늙어가는 엄마는 점점 겁이 난다. 최근 어지럼증과 이명이 겹치는 '메니에르병' 진단을 받은 뒤 더 조급해졌다. 봉준 씨가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죽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데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들을 보면 답답한 마음뿐이다.
"직업훈련 대상이 되는 아이들은 극소수예요. 의사소통이 힘들고 이따금 나오는 돌발행동으로 일하기 어려운 아이들이 훨씬 많거든요. 이런 아이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주간보호센터와 그룹홈을 결합한 시스템을 제도화해야 합니다."
◇ 발달장애인에게 따뜻한 일상을 요구합니다
야외 프로그램에 참여한 봉준 씨. 사진=꿈자람터장애인주간보호센터 제공
발달장애인은 다른 유형의 장애인에 비해 일을 그만두는 비율이 높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식의 돌발행동이 그 이유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행동을 발달장애인 고유의 특성으로 치부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다.
돌발행동은 의사소통 능력이 부족한 발달장애인이 정신적 충격이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스트레스를 스스로 조절하기 힘든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같은 업무환경이나 생활조건을 요구하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일자리는 생산의 보람과 심리적 안정을 두루 맛보는 행복한 시간으로 채워져야 한다.
김 씨는 푸르메에코팜이 능력만큼 일하고 힘들면 쉴 수 있는 조건, 자연 속에서 치유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환경, 스포츠와 예술 활동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춘 곳이면 좋겠다고 한다. {RELNEWS:right}
"푸르메재단이 생산활동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병행할 수 있는 행복한 일터를 만들고, 자치단체가 주간보호센터나 평생교육센터, 그룹홈까지 지원해서 결합시킨다면 이상적인 그림이 될 것 같아요. 그런 공간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