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진=연합뉴스 제공)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등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면서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아베 총리는 지난 2일자 일본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건을 붙이지 않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솔직하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아베 총리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한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기 총리 후보 물망에 오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납치문제의 해결에 대해서는 주체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하루라도 빠른 해결을 위해 다양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아베 총리가 전날 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전달한 뒤 나온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북한의 최근 잇단 무력시위에도 직접적인 비판은 삼간 채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아베 총리는 지난 14일 북한의 9일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해서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한 것으로 극히 유감"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는 국내 지지층의 우려를 반영한 속도조절 수준에 불과하며 일본의 대북정책 기조 자체는 분명한 방향 전환에 들어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지금까지는 핵탄두와 중장거리 미사일, 생화학무기에다 납치 문제까지 해결돼야 북일 수교가 가능하다고 했는데 이제는 아무 조건 없이 만나자고 하는 것이고, 미국으로부터 오케이도 받았다"며 "대북기조가 확실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이런 발 빠른 변신은 지난 1년여의 한반도 비핵화 협상 국면에서 배제됐다는 '재팬 패싱' 현상을 돌파함으로써 지지기반을 더욱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분석된다.
미국과는 더 밀착됐고 중국과도 관계가 호전됐지만 한일관계는 역대 최악이고 북한과는 한반도 주변국 가운데 유일하게 접촉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베 총리가 외교 치적으로 삼으려는 러시아와의 북방영토 협상은 최근 자국 의원의 '전쟁' 망언 파동으로 오히려 악화됐다.
일본 내 정치 일정도 7월 참의원 선거와 10월 소비세 인상을 앞두고 있어 북일관계 개선으로 출로를 모색할 필요가 커졌다.
아베 총리로선 대북 접근이 성공리에 이뤄질 경우 '재팬 패싱'을 일거에 불식시키고 북미협상의 중재자로서 동북아 외교의 중심에 설 기회를 노릴 수도 있다.
북한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국의 중재 역할을 거부하고 있고, 중국은 미중 무역전쟁에 발목이 잡혀있으며, 러시아 역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는 미묘한 관계여서 역할이 제한돼있다.
북미협상의 주도권은 현실적으로 미국에 있음을 감안할 때 현재로선 트럼프 대통령과 가장 밀착된 아베 총리의 영향력이 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일본의 손짓에 선뜻 응할 가능성은 낮다.
일본이 스가 관방장관의 표현대로 '주체적 대처'와 '과감한 행동'으로 전환하며 대미 자율성을 확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대북제재 프레임의 한계가 명확한 것이다.
북일 수교를 위해서는 납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제재 완화 및 해제가 불가피한데 미국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 센터장은 "일본으로서는 주요 국제관계에서 배제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형식적인 제안을 한 것으로 본다"며 북미간 협상에도 별다른 변수가 되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북한으로선 지난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정상회담으로 대미협상에 지렛대를 얻는 듯 했지만 오히려 납치 문제만 불거지면서 곤경에 처했던 아픈 기억도 있다. 당시 고이즈미 총리를 수행했던 인물이 아베 총리다.
따라서 북한은 일본과의 협상만큼은 톱다운 방식을 거부하고 실무회담을 통해 정상회담의 조건을 충분히 확보하는 쪽을 선호할 것으로 보인다.
양기호 교수는 "아베 총리가 북일 정상회담 뉴스를 계속 띄우는 것은 국내 정치용"이라며 "북한도 쓰라린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실무자들 입장에선 회담을 추진하는데 부담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