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여사님은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의 배우자, 영부인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입니다."
지난 10일 이희호 여사가 별세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SNS에 남긴 말이다. 이 말처럼 이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의 가장 든든한 정치적 동지인 동시에 일찍이 국내 여성 인권을 위해 발로 뛰면서 노력해 온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인 '동행'과 이희호 여사의 평전 '고난의 길, 신념의 길'(한겨레), 이밖에 언론 보도들에서 그가 남긴 여성운동가로서의 발자취를 정리해봤다.
◇ "신음하는 여성 희생자들, 원인은 가부장제였다"이화여전, 서울대학교에 재학할 시절부터 이희호 여사는 남녀차별이 만연한 세태에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화여전 시절 농촌 지역에 파견된 이 여사는 가부장제 아래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을 목격한다.
그는 '동행'에서 당시를 "농촌 아낙네들의 현실은 가혹했다. 권위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중노동에 짓눌렸다. 농촌 여인들의 삶은 오로지 가족을 위한 희생뿐이었다"고 서술했다.
서울대 시절에는 남존여비 사상에 짓눌려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는 여자 대학생들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고난의 길, 신념의 길'에서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에 남녀 학생들이 같이 모이면, 남학생들은 맥주를 사다가 마시는데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앞이라고 수줍어서 과자도 제대로 집어먹지 못하고 고개만 수그리고 있다. 여자들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거다. 그런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보라고 했다"고 밝혔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 여사가 여성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전쟁의 또 다른 희생자인 여성들이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차별적 현실이 그를 여성운동가의 길로 이끌었다.
이 여사는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여성 사회 진출과 권익 향상을 돕고자 별도의 대한여자청년단을 결성하는가 하면,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해 국내 여성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실질적인 투쟁에 나섰다.
"나는 여성운동이 하고 싶었다. 여성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다. 남성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전사하면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순국선열의 반열에 올라간다. 그러나 후방의 희생자인 여성들에게는 불명예와 수모만 있을 뿐이었다. 몽골군에게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는 화냥년으로,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정신대'는 가문의 수치로, 한국전쟁의 피해자는 '양공주'로 낙인찍히고 멸시당했다. 원인은 가부장제였다." ('동행' 中)
◇ '일부다처제' 고통받는 여성들 위한 해방운동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이희호 여사는 대한 YWCA에서 활동하며 '혼인신고 합시다' 캠페인을 벌였다. 축첩이 만연했던 시대, 일부다처제로 고통받고 있던 여성들을 위한 해방 운동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결혼 역시, 정치인 남편에 대한 '내조'나 '사랑'보다는 서로 공유하고 쌓아간 동반자적인 감정을 기반으로 이뤄졌다.
마포구 동교동 자택의 문패 일화로부터 서로를 동등한 인격체로 마주했던 이들 부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남편이 가정을 대표했던 시절,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문패와 이희호 여사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함께 주문해 대문에 내걸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 나 역시 가부장적인 전통 관념에 찌들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비하와 멸시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 때문이다. 아내 덕분에 나는 인류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의 합작품…'가족법' 개정안남편의 행보와 별개로 이희호 여사는 독자적인 여성주의 운동을 이어나갔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회장을 맡으면서 여성노동자의 열악한 근로 환경을 조사해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발간했고, 주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의 정치의식을 조사했다. 다른 여성단체들과 연합해 '요정정치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국회의원 시절 김대중 대통령이 주도했던 1989년 '가족법' 개정 역시 이희호 여사와 김 대통령의 합작품이었다. 여야 남성 국회의원들이 이에 반대했지만 호주제와 동성동본 금혼 규정을 빼고 가는 조건으로 우여곡절 끝에 가족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 여사는 '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통해 "가족법 개정은 내 평생소원이었다. 헌법은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있는데 가족법은 일제강점기에 틀이 만들어진 뒤로 거의 바뀌지 않았다. 1960년, 1977년 두 차례 손질했는데 여전히 남녀차별 조항이 많다. 여성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들, 손자에게까지 법률상 종속돼 있었다. 가족법 개정 문제만큼은 내 생각을 남편에게 전했다"고 '가족법' 개정이 절실했던 이유를 전했다.
◇ 정치적 동반자부터 '미투' 운동 지지까지1998년 영부인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다음에도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한 이희호 여사의 직·간접적인 행보는 계속됐다. 행사 참여 등이 중심이었던 제2부속실 역할을 아동과 여성을 위하는 일로 확대했을 뿐아니라,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부, 문화관광부, 환경부, 보건복지부 등이 신설돼 4명의 여성 장관이 임명됐다.
앞서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처럼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이희호 여사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희호 여사는 지난해 3월 거세게 일어난 '미투' 운동에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여사는 "그런 일이 그동안 어떻게 벌어지고 있었는지 정말 놀랐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어떻게 여성들을 그렇게 함부로 취급할 수 있는지 너무 화가 난다. 용기 있게 나서는 거 보면 좋고, 대견하고 고맙다. 우리 땐 생각도 못했다.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갔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평생에 걸쳐 그가 염원하고 꿈꿔온 것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인격체로 설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아울러 또한 나의 지극한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동행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