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이범호의 은퇴경기 마지막 타석 (사진=KIA 타이거즈 제공)
홈런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만루포를 누구보다 많이 때렸다. 승부처에서 유독 강했던 그가 꽃같은 미소를 지을 때마다 팬들도 함께 웃었다. 그라운드를 환하게 밝혔던 프로야구의 '꽃'이 떠난다.
13일 광주 KIA챔피언스필드에서 2019 신한은행 MY CAR KBO 리그 KIA와 한화의 경기가 열렸다. 팬들로부터 '꽃범호'라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KIA 이범호는 19년 전 자신이 데뷔한 친정팀을 상대로 의미있는 현역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이범호의 마지막 타석에서 상징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6번타자 3루수로 선발 출전해 2회말 볼넷, 4회말 중견수 플라이를 각각 기록한 이범호는 5회말 2사 만루에서 타석에 섰다. 기대감이 고조된 그라운드는 관중의 함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이범호는 '만루의 사나이'다. KBO 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17개의 만루홈런을 터뜨린 선수다.
이범호의 타석을 앞두고 만루 상황이 완성되자 관중석에서 기립박수가 터졌다. 이름을 힘차게 외친 KIA 팬들의 바람과는 달리 드라마와 같은 장면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범호가 때린 뜬공은 좌익수 정면을 향했다.
비록 한방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만루의 사나이'로 불렸던 선수에게 어울리는 마무리였다. 선수에게나 팬들에게나 모두에게 감동의 장면으로 남았다.
이범호는 6회초 수비를 앞두고 교체돼 현역 마지막 경기를 마무리한 이범호는 관중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덕아웃에서는 눈물을 흘렸다. 동료들은 그를 안으며 격려했다.
이범호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한화에서, 2011년부터 올해까지 KIA에 몸담으며 KBO 리그의 정상급 내야수로 활약해왔다.
이범호는 KBO 리그 역사상 2000경기 이상 출전한 13명 중 한명이다. 통산 타율 0.271, 329홈런, 1127타점을 기록했다.
통산 홈런 부문에서 리그 역대 5위, 타점 역대 8위에 오르며 자신의 이름을 KBO 레전드의 자리에 남겼다.
한화에서 유격수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범호는 2005년 포지션을 3루수로 전환한 뒤 승승장구했다. 2005년과 2006년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범호는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했고 2009년 제2회 WBC에도 참여한 KBO 리그의 간판급 3루수였다.
이범호가 2009년 일본과의 WBC 결승에서 1점차로 뒤진 9회말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극적인 동점 적시타를 때린 장면은 한국 야구 팬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명장면이다.
2010년 일본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했다가 1년만에 실패를 겪고 돌아온 이범호는 KIA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범호는 베테랑이 된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 연속 20홈런 이상을 기록했고 KIA의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이범호는 그해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그랜드슬램을 쏘아올려 자신의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KIA는 이날 5대10으로 졌지만 KIA 팬들은 승패보다 이범호와 함께 하는 마지막 순간을 더 즐기는듯 보였다.
KIA도 이범호를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경기가 끝난 뒤 만루 상황에서 이범호에게 타격 기회를 주는 이벤트였다. 이범호는 보란듯이 좌중간 방향으로 만루포를 때렸다.
이범호는 과거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꽃보다 아름다워'에 출연했던 개그맨 오지헌과 닮았다며 팬들로부터 '꽃범호'로 불렸다.
2007년 한화의 준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이범호가 홈런을 치자 중계방송사가 화면 배경을 꽃으로 채워 야구 팬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낸 적도 있었다.
팬들은 그라운드의 '꽃'을 사랑했다. 이날 KIA챔피언스필드는 만원 사례를 이뤘다. 관심도가 높은 시즌 개막전 이후 첫 매진. 이범호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범호는 경기 후 진행된 은퇴식에서 "이범호라는 선수가 은퇴하는데 (야구장이) 가득 차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가장 많이 한 것 같다. 떠나는 저에게 박수를 보내주시기 위해 이렇게 가득 채워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범호는 "처음 시작을 여기서 하지 않았던 저에게 이런 사랑을 보내주시고, 아까 (5회말) 만루 타석에서는 진심으로 환호성이 너무 커서 정말 감동받았다. 홈런으로 보답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범호는 함께 걸어온 동료들과의 추억을 전하다 "팔 아픈 윤석민이 (여기) 와 있다. 못 나오고 있어서 내 마음이 좀 아프다. 석민이가 다시 부활할 수 있도록 (응원) 많이 부탁드리겠다. 여기 없지만 떠난 (이)명기에게도 고맙다"고 말했고 팬들은 이범호의 따뜻한 마음에 아낌없는 박수를 건넸다.
이어 이범호는 "머리 속에 기억하는, 2017년 11월1일, 우승 멤버들과 함께 했던 생애 첫 번째 우승을 평생 기억하면서 살아가겠다. 한화 팬들에게는 우승을 못해드리고 가서 너무 죄송하다. 한화도 우승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이범호는 자신의 등번호 25번을, 자신이 뛰었던 3루수 포지션에서 주전으로 도약한 후배 박찬호에게 넘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