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엄혹했던 1974년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 야욕을 채울 목적으로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을 잇따라 터뜨리면서 한국 사회는 깊은 어둠에 잠긴다. 그해 7월 18일 서울 종로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박정희 정권의 만행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말 그대로 어둠을 몰아내는 한줄기 빛이었다. 1970, 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구심점 '목요기도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수많은 시국사건 구속자·피해자 가족은 물론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목요기도회에 함께했다. 독재정권이 언론 보도를 철저히 통제하던 때, 이들 사건은 목요기도회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이목을 끌기에 이른다.
책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세상을 밝힌 한국 기독교 저항사'(강성호·복있는사람)는 목요기도회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74년 7월부터 시작된 목요기도회는 고난당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려줌으로써 독재권력의 폭력성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목요기도회는 집회의 자유가 억압된 상황에서 그나마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대안적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요기도회에서는 유신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의 중요한 성명서들이 발표되기도 했으며, 종종 가두시위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목요기도회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매주 합법적으로 열리는 반정부집회였던 셈입니다. 그러니 당국은 목요기도회가 열릴 때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해를 일삼았습니다. 목요기도회는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이 인권운동을 펼치는 데 아주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당국의 탄압으로 한동안 열리지 못한 적도 있지만, 꾸준히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어 권력의 폐부를 찔렀거든요. 특히 구속자들의 고문 폭로와 수사 과정에서의 조작내용 폭로는 대부분 목요기도회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목요기도회가 열리는 기독교회관은 명동성동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267, 268쪽) 서슬 퍼렇던 독재정권 아래에서도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응집됐던 데는 당대 깨어 있는 기독교 세력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북간도 출신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 항일무장투쟁에 뿌리내린 북간도 기독교…한국 교회 새 역사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북간도는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나라 밖 항일 독립 무장투쟁 전초기지였다. 이곳은 그 시절 선진 사상·문물의 통로 역할을 했던 기독교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덕에 교회·학교를 중심으로 탄탄한 공동체를 꾸릴 수 있었다.
당대 '간도 대통령'으로 불리운, 북간도 한인 사회 지도자 규암 김약연(1868~1942)의 유언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를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북간도에는 기독교에 바탕을 둔 실천적 사상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북간도에서 독립운동 기반을 다지고자 학교를 세우고, 민족의식을 심어주면서 후대를 기를 수 있던 동력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시인 윤동주(1917~1945) 고향으로도 널리 알려진 명동촌은 그 대표적인 곳이다.
북간도 일대에서 이뤄진 항일 독립 무장투쟁은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으로 열매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익히 알려졌듯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일제의 지속적인 보복 만행과 내부 분열에, 1930년대 일제가 이곳까지 진출해 만주국을 세운 탓이다. 무장투쟁의 근거지는 그렇게 중국·러시아 내륙 등지로 옮겨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간도 한인 사회 내 민족 교육은 은진중학교 등을 통해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렇게 북간도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인재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들은 해방 뒤 한국 사회로 돌아와 새로운 교회의 역사를 쓰면서 엄혹한 시기를 몰아내는 커다란 물줄기를 이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세운 김재준(1901~1987) 목사, 기장의 거목 강원용(1917~2006) 목사, 민주화·인권 운동을 이끈 문익환(1918~1994)·문동환(1921~2019) 목사, 민중신학 창시자 안병무(1922~1996) 박사 등이 그 면면이다.
◇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북간도 기독교는 이른바 '천당' '지옥'보다는 '민족' '해방'을 더욱 강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명동촌이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데는 일제에 맞설 수 있도록 후대에게 근대 교육을 가르칠 기회를 얻기 위한 측면도 컸다. 이러한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열망은 윤동주 '서시'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북간도 출신 기독교인들이 모순 가득한 사회를 겨눈 투사처럼 불의에 항거하고, 비뚤어진 것을 바로 세우는 일을 마땅히 짊어지면서 널리 실천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데다 한국전쟁과 독재정권 탓에 시름하던 까닭이리라.
글 첫머리에 언급했던, 당대 목요기도회를 이끈 김상근 목사(KBS 이사장)는 "특징이 있다"며 항일 독립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선대의 뜻과 정신을 이어받은, 북간도 출신 기독교인들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삶이 매우 재미 없는 거죠. 목적지향적이고요. (선대) 북간도 어른들의 삶이 대단히 목적적 삶이었지 않습니까. 그런 삶을 보고 배운 거죠. 그 이후에 (한국 사회로 건너왔을 때) 민주화를 해야 하고, 인권을 신장시켜야 되고, 통일을 지향해야 되고, 그러한 역사적인 책무 속에서 역시 자기들이 보고 배운 그분들처럼 삶이 목적적으로 된 것이 아니었겠는가."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