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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직시했던 마지막 '북간도의 별'

문화 일반

    극단의 시대 직시했던 마지막 '북간도의 별'

    [북간도 연대기 ⑫] 굴곡진 근현대사 증인 故 문동환 목사
    반독재·민주화 헌신…"감옥 생활, 오히려 마음 뿌듯했다"
    '민중' 너머 '떠돌이' 신학 확장…말년 이주민 문제에 천착
    북간도 '마지막 후예'의 유훈 "역사가 우리를 만들어준다"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지난 3월 9일 98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은 고 문동환 목사는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 무장투쟁 중심지로 꼽히던 북간도 명동촌에서 나고 자랐다. 해방 뒤 한국 사회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고인은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직시한 '시대의 증인'이다.

    1976년 3월, 문동환 목사는 감옥으로 향하는 차량에 몸을 싣고 있었다. 정계·학계·교계 유력인사들이 박정희 독재정권을 강하게 비판한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에 참여했던 까닭이다. 유신체제로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마저 빼앗은 채, 박정희 독재정권이 장기집권이라는 헛된 꿈을 꾸던 시절이었다.

    그달 1일 명동성당에서 낭독된 선언문은 이랬다.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은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따라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룩해야 한다."

    지금 시대에도 여전한 과업으로 여겨지는 선언문 내용을 접한 당대 청중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으리라. 문 목사는 자서전 '떠돌이 목자의 노래'(삼인)에서 '이 모임을 기도회라고 생각했지, 긴급조치(유신헌법에 근거해 대통령이 발령했던 특별조치) 9호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모임인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문 목사는 자서전에서 당시 감옥으로 갇히게 된 심경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비로소 교도소 생활을 경험하게 되는구나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뿌듯했다. 독립 운동의 요람이기도 한 간도에서 자란 나는 민족운동에 투신한 분들이 감옥에 들락날락하던 이야기를 무수히 들었다. 우리 아버지도 해방을 전후해서 세 차례나 감옥 생활을 하셨고, 윤동주, 송몽규 같은 젊은 선배들도 민족주의자로서 해방 직전에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나는 아직 감옥 구경을 해 보지 못한 것이 은근히 부끄럽기도 했는데 이제 비로소 서대문 서울구치소를 향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뿌듯했다.' (15쪽)

    ◇ "내세 구원 아닌 나라 독립 위해 싸웠던 것처럼 내겐 아주 당연한 일"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문동환 목사는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2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후 옥을 벗어나서도 1979년 'YH무역사건'(가발 제조업체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부당 폐업에 항의해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일. 유신체제에 균열을 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등을 지원하면서 다시 투옥되기에 이른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이는 민족주의에 뿌리내린 북간도 특유의 기독교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 1961년 한신대 교수로 부임한 이래 반독재 운동에 앞장서며 해직과 복직을 반복했던 '깨어 있는 어른'으로서 문 목사의 면모는 자서전에서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학교에 들어오게 된 나는 교회가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를 극복하고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촛불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제 밑에서 북간도의 명동교회가 내세의 구원이 아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것처럼. 내게는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22쪽)

    이같은 문 목사의 삶에 대해 강순원 한신대 교수는 "분단된 사회 속에서 민족 분단을 극복하고 해방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시민 사회와 함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 문동환 목사는 거의 매주 (1970, 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구심점이던) 목요기도회에 나와서 설교를 하고 들으면서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가족들도 만나고 했다. 해방신학, 해방교육 같은 것을 소개했는데 그것이 실천적 삶으로 연결돼 (담임했던) 수도교회도 그런 식으로 운영했다. 항상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함께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과 같이 함께하는 생활에 너무나 익숙했다."

    ◇ 삶과 배움 일치시킨 '시대의 어른'…"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1921년생인 문동환 목사는 우리 사회 민주화·인권·통일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준, 북간도 기독교 정신을 간직해 온 마지막 후예였다.

    함께 시대를 짊어졌던 북간도 출신 기독교인들을 먼저 떠나 보낸 그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세운 김재준(1901~1987) 목사, 기장의 거목 강원용(1917~2006) 목사, 민주화·통일 운동 거목 문익환(1918~1994) 목사, 민중신학 창시자 안병무(1922~1996) 박사….

    고인은 1990년대 미국 생활을 하면서 민중신학을 심화시킨 '떠돌이 신학' 연구에 천착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아래 고향에서 밀려나 저임금에 허덕이는 이주 노동자들을 향해 눈길을 돌린 것이다.

    이는 스스로 나라 잃고 만주 북간도에서 항일 독립 무장투쟁을 보고 자란 후예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분단·전쟁·독재의 참상을 목도한 지식인으로서 문 목사가 실천했던 일들과도 궤를 같이 한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다음과 같이 웅변한다.

    '무엇보다 세계 도처에서 빈부 격차를 조장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의 악랄한 횡포가 나를 가만히 있을 수 없게 했다. 신자유주의로 말미암아 고향에서 쫓겨나 세계 곳곳에서 유리방황하는 떠돌이들이 계속 늘고 있다. 그들의 아우성 소리가 만주에서 떠돌아다니는 동족을 보면서 아파하던 기억을 지닌 내 심장에 화살처럼 꽂혔다. 박정희 독재 밑에서 신음하던 민중을 보면서 분노하던 기억을 지닌 내 마음에 다시 불을 질렀다.' ('책을 내며 : 내 이야기를 쓰게 된 까닭' 중에서)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해 10월 문 목사가 병상에 누운 채로 남긴 유훈은, 시대의 모순을 직시하는 일을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그의 삶과 겹쳐 보다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사람을 육성하는 것은 그 시대가 하는 일이야. 우리 시대는 일본 사람들이 와서 난동을 했으니까, 거기에 반발하면서 우리가 형성됐지. 지금은 자본주의·제국주의 세력이 와서 판을 치고 있잖아. 물질주의지. 거기에 다 유혹을 받고 있어. 유혹을 받는지도 모르고 그냥 쫓아가는 것이 대부분이지. 그것을 경계하면서 생명중심의 문화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겠지."

    "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하게 되고 예수님하고 교류하게 되는 경험을 가질 거야.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내가 영웅적으로 산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그렇게 끌고 갔지. 역사가 우리를 만들어줘."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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