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상을 차리려고 보니 아버지가 뭘 좋아하셨는지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없으셨어요. 아버지께 음식은 항상 맛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먹는 거였어요"
지난 16일 빈소에서 만난 故이대준씨의 딸 진아(33)씨는 아버지를 추억하며 이같이 말했다. 진아씨는 "아버지가 유일하게 자주 드시던 게 '생쌀'이었어요. 맛도 없고 딱딱하기만 한 것을 왜 먹냐고 물으면 '선감도에 있던 시절 창고에서 몰래 훔쳐서 친구들이랑 먹었던 추억이 떠오른다'고 하셨어요"라고 회상했다.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이대준씨가 지난 15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1세. 간암 말기였다. 3년 전 얻은 그의 지병도 결국 어릴 적 선감학원에서 밴 나쁜 경험에서 비롯했다.
"밥을 엄청 빨리 드세요. 선감학원에 계실 때부터 그렇게 됐대요. 밥을 빨리 먹지 않으면 남은 밥들을 다 뺏길뿐더러, 늦게 먹은 순서대로 매질을 맞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들 현진(31)씨는 "아버지의 식습관은 평범한 사람과 너무 달랐다"고 전했다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겨서 매일 거의 씹지 않고 드시고 하다 보니까, 소화기관이 많이 안 좋으셨어요. 헛구역질도 많이 하셨고. 그러다가 3년 전 쓰러지시면서 배 안의 혹 같은 게 터졌어요. 그게 혈관을 타서 간 쪽으로 옮겨졌어요. 처음 진단명은 복강 내 출혈이었는데, 이게 전이가 돼서 간암이 된 거죠"
故이대준씨 손자가 촬영한 생전 이씨의 모습./사진=이대준씨 아들 현진씨 제공
◇"9살에 끌려가 15번의 시도 끝에 9년 만에 탈출"고아였던 이대준씨는 수원 보육원에 있다가 9살쯤 선감학원으로 끌려왔다. 이후 1975년 헤엄을 쳐서 탈출하기까지 9년 동안 수도 없는 매질과 학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성폭행도 당했다. 인근 학교에 다녔지만, 그마저도 5학년 때 퇴학을 당하면서 탈출하기 전까지 종일 노역만 했다고 한다.
누에 키우는 일을 하는 '양잠반'이었던 이씨는 잠도 못 자고 매 두 시간마다 일어나서 누에 밥을 줬다. 살면서 한 번도 깊게 잠을 자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진아씨는 "밤에도 계속 일을 시키니까 밖에서 자기도 했다고 하셨다"며 "평생 '밤에 누워 잠을 자서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한 번이라도 안 깬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잠을 많이 못 주무시는 게 평생의 삶에 영향을 많이 미치셨던 것 같아요. 그런 기억 때문이신지 저와 동생은 무조건 정해진 시간에 재우셨어요. 전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저녁 9시면 무조건 잤어요"
15번의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한 이씨. 하지만 세상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가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식당을 하는 한 할머니 밑에서 일을 시작한 이씨는 이후 길거리에서 껌도 팔고, 새우잡이 배도 타고, 막노동도 하고, 나이트클럽에서도 일하는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다 아내를 만나 가족을 꾸린 이씨는 자녀들을 정말 아꼈다고 한다. 현진씨는 집에 늦게 들어오던 어느날 아버지가 자신을 붙잡고 '어디 간다고 얘기 좀 해주라. 너가 아무리 성인이라고는 하지만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자 가족이다. 너가 없어지면 너무 불안하다'고 말했던 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가 가족이 없으셨으니까, 저한테는 가족이란 무엇인지 좀 더 보여주려고 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가 만약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나도 우리 아빠가 해왔던 것처럼 사랑을 줘야겠다' 생각하곤 해요. 제 자식한테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꼭 물려주고 싶어요"
선감학원 기록사진./사진=국가인권위원회 제공
◇'소년판 삼청교육대' 선감학원, 수천명의 소년들 불법 납치해 강제노역'소년판 삼청교육대'라 불리는 선감학원은 일제 강점기인 1942년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해방 후 경기도가 인수해 1982년까지 국가 정책에 따라 부랑아 수용 시설로 활용했다. 당시 정부는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 또는 길거리에서 행색이 남루한 아이들을 납치해 선감학원으로 보냈다. 여기에 동원된 이들은 경찰, 군인, 공무원 등 국가였다.
끌려간 아동만 파악된 수가 총 4691명이다. 대부분 8~10살이었다. 탈출하다가 바다에 떠밀려 가거나, 구타와 질병 등으로 죽었지만 어디에 묻혔는지 몰라 집계되지 않은 수까지 포함하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대준씨와 함께 선감학원 생활을 했었다는 국수현(58)씨는 빈소에서 취재진을 만나 "시체가 바다에 떠밀려서 오기도 했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전했다.
"선생들이 그걸 우리한테 묻으라고 시킵니다. 여러 군데 가서 묻었어요. 인근 산에다 가서 묻기도 했는데, 최근 가보니 아예 개발이 돼서 없어졌더라구요"
그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안 먹어본게 없다고 했다.
"도망가면서도 죽고, 맞아서도 죽고, 아파서도 많이 죽었어요. 일단 먹을 게 부실하다 보니까 '쫀드기'라고 바닥의 황토를 캐서 먹기도 하고, 뱀도 잡아 먹고, 풀뿌리도 캐서 먹었어요. 안 먹어 본 게 없어요. 근데 그렇게 먹고 탈이 나도 배꼽에다 '아까징끼(머큐로크롬, 빨간약)' 발라주는 게 전부였죠"
피해생존자들은 어릴 적 선감학원에서의 트라우마에 평생을 시달리고 있다. 정신적인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기보다는 점점 선명해졌다. 국씨는 "한 번도 수면제 없이 잠이 들어 본 적이 없다. 자려고 누우면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날 괴롭힌다"고 말했다. 빈소에서 만난 피해 생존자 중 다수는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었다.
2019년 대한문 앞에서 故이대준씨(왼쪽)와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김영배 회장(오른쪽). /사진=김영배 회장 제공
◇고인 죽기 전까지 '과거사법 통과' 외쳤지만…생존자들 "20대 국회에서 통과되길"하지만 피해 회복을 위한 국가 차원의 진실 규명과 보상은 한없이 더딘 상황이다. 권위주의 시절 이유 없이 국가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강제 노역에 시달렸지만, 국가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피해 생존자들은 "한 명이라도 더 생존해 있을 때, 국가가 명예를 회복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빈소에서 만난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협의회) 김영배 회장은 "아무 죄 없이 잡아가 놓고는 이제 와 진실을 밝히고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억울한 경우가 어딨나"라고 토로했다.
김 회장은 "과거를 외면하는 국가가 무슨 국가냐. 국가가 과거를 인정하고 우리의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조금이나마 보상해 주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따르면 현재 생존자는 100여명.
이들은 20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이 통과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과거사법은 '6.25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을 비롯해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서산개척단' 사건 등의 진실 규명과 피해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제는 무엇보다 피해 생존자들이 고령인데다, 과거 트라우마로 인해 건강마저 좋지 않다는 점이다. 김 회장은 "모두 어릴 적의 영양 부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사회에 나와서 과거를 잊고자 술을 많이 마셔 건강이 좋지 않다"며 "법이 통과돼도 조사까지 수년이 걸리는데, 그 전에 대준이처럼 한두 명씩 세상을 떠날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이씨 역시 과거사법 통과를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뛰어다녔다.
"아버지께서 아프신데도 불구하고 국회 토론회도 참석하고, 언론 인터뷰도 하는 등 진짜 열심히 하셨거든요. 근데 저희는 아버지 건강이 더 걱정되잖아요. 그래서 말리면 아버지께서 '살아 있을 때 해야지, 이러다 갑자기 죽으면 너무 후회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돌아가시기 전에 잘 풀렸으면 좋았을 텐데…"(故이대준씨 아들 현진씨)
저녁 9시가 되어갈 때쯤 이씨의 빈소는 그를 '형제'라 부르는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들로 가득 찼다. 모두 어릴 적 선감학원에서의 경험에서 비롯한 아픔을 간직한 채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선감학원 탈출 후 40여년 만에 다시 만났지만 반가움은 잠시였다. 그들은 바뀌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고인을 추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