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상 수상에 환호하는 봉준호 감독과 출연 배우들. (사진=연합뉴스)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Once you overcome the one-inch tall barriers of subtitles, you will be introduced to so many more amazing films.)"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지난달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뒤 밝힌 수상소감이다. 영어권 국가의 관객들이 영문 자막이 필요한 비영어권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을 에둘러 지적하며 '1인치의 장벽'을 넘어설 것을 넌지시 요청한 내용이다.
하지만 '1인치의 장벽'을 넘고 싶어도 넘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청각 장애인들이다.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을 기념해 영화 '기생충'이 국내에서 재개봉했지만, 청각 장애인을 위해 한국어 자막을 지원하는 '배리어 프리'(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물리적 장벽을 없애는 것) 상영관은 단 한 곳도 없다.
반면 국내에 있는 외국인 관객을 위한 영어 자막 상영은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CGV는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휩쓴 지난 10일 저녁부터 전국 30개 극장에서 '기생충'을 특별상영하고 있다. 영어 자막 상영은 30개 극장 모두에서 하루 1회차 이상 편성돼있다.
롯데시네마에서도 10일부터 30개 극장에서 '기생충'을 상영하고 있으며, 그 중 15개 상영관에서 영어 자막 서비스를 제공한다. 메가박스의 경우 지난 11일 전국 26개 극장에서 재개봉했고, 4개 상영관에서 영어 자막 상영을 하고 있다.
CGV 관계자는 "'기생충'이 처음 상영됐을 때는 '가치봄'(한글자막 화면해설 서비스) 행사를 통해 시∙청각장애인들도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며 "재개봉 이후에는 아직 배리어 프리 상영에 대해 얘기된 바 없다. 장애인 단체의 재상영 요구가 있을 경우 상영이 가능한데, 이 부분에 관해선 협의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청각 장애인들은 "농인에게도 1인치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나섰다.
본인을 청각 장애인이라고 밝힌 A씨는 지난 14일 한 영화 온라인 커뮤니티에 "'기생충' 재개봉에 한글 자막이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며 "누군가는 그냥 영어자막을 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어를 쓴다. 모든 청각 장애인이 영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다"라는 심경을 전했다.
다른 청각 장애인 B씨도 "한글 자막을 통해 영화를 즐겨보는 농인으로서 '1인치 자막의 장벽'을 언급한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가 무척 인상 깊었다. 한편으로는 그 말에 수많은 한국인과 미국인이 열광하는 것을 보니 조금 놀라웠고 낯설게 느껴졌다"고 밝혔다.
그는 "농인은 분명 한국인인데도 한국 영화 앞에서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던 때가 있었다"면서 "아직까진 현재 진행형이다. 전 세계인뿐만 아니라, 농인에게도 1인치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날이 오기를"이란 글을 남겼다.
한국농아인협회 관계자는 "'가치봄' 행사가 아니면 시∙청각장애인들은 한국영화를 볼 수 없는 환경"이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나라들이 있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기술적 문제, 예산 문제 등이 얽혀 있다 보니 장애인 분들이 실감할 만큼 개선되지는 못하고 있다. 현재로선 배리어 프리 상영관을 확대하는 것이 현실적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또 "'기생충' 재상영에 대해선 협회 측도 고민하고 있다. 다만 2월에는 코로나19 때문에 '가치봄' 행사를 열기 힘들 것 같고, 3월에도 계속 수요가 있는지 추이를 지켜볼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