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차별철폐와 인권·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현행 고용허가제에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정다운 기자)
"지게차 면허가 없는데 운전을 시켜서 못하겠다고 하니 불법체류자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몽골 출신의 이주노동자 A씨는 18일 오후 일터가 아닌 헌법재판소 앞에 섰다. 2018년 12월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왔지만 배정된 사업장에서는 관련 면허가 없는 A씨에게 지게차 조종을 지시했다.
해당 업무를 위해서는 건설기계조종면허가 필요하고 이를 위반하면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A씨는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지냐"며 업무를 거부했지만 사업주는 "몽골로 보내버리겠다. 불법체류자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다. 고용센터에 사법장 변경을 요청했지만 법상 변경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설명만 들었다.
이주공동행동 등 이주인권단체들은 이날 헌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외국인고용법 제25조 등 사업장 변경제한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현행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은 한번 사업장이 정해지면 고용허가가 만료되는 4년 10개월(기본 3년·연장 1년10개월) 동안 일터를 바꿀 수 없다. '성실 근로자 재고용' 제도를 이용해 추가로 4년 10개월을 재고용 계약 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장 9년 8개월간 한 사업장에서만 일해야 하는 셈이다.
예외적으로 사업주가 근로계약 해지를 원하거나 휴·폐업한 경우, 사용자가 근로조건을 위반하거나 부당한 처우를 한 경우에만 고용센터의 심사를 통해 일터가 변경된다. 이러한 사유가 아니라면 사용자의 허가가 있어야만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고 횟수도 3회를 초과할 수 없다. 이주노동자가 원해서 스스로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는 셈이다.
이주인권단체들은 이를 사실상의 '강제노동'이라고 표현한다. 이주노동자들은 이미 까다로운 입국 절차를 거쳐 한국에서 일할 권리를 얻었는데도 일터를 통제 당할 뿐 아니라 따르지 않을 경우 강제출국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내국인에게 적용되는 근로기준법에서는 계약서상 명시된 근로조건이 실제와 다를 경우, 근로자가 즉시 근로계약을 해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건 위반을 사유로 사업주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는 사업주가 급여를 체불하더라도 체불임금 액수와 기간이 어느 정도를 초과해야만 사업장 변경의 사유로 인정된다. 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한국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임금을 체불하는 일터에 나가 무급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 이번 헌법소원에 참여한 이주노동자 청구인 5명은 심판청구서에서 한국에서 계속 일하기 위한 대가로 무급·불법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고 호소했다.
B씨는 사전 근로계약과 달리 매일 3시간가량 무급 연장근로를 해야 했다. 계약서상 매월 받아야 할 통상임금은 175만원 상당이지만 실제로는 131만원밖에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최근 고용센터와의 상담을 통해 이러한 조건 변경은 사업장변경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설명을 들었다.
C씨는 취업활동 기한 만료를 3개월 앞둔 상황에서 손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 사업주는 C씨에게 오히려 근로계약을 불이행한 위약금 명목으로 300만원을 예치하라고 요구했다. 취업활동 기간을 연장하려면 사업주의 재고용 허가 요청이 필요한 상황에서 C씨는 사업주의 부당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D씨는 인체에 유해한 유기용제를 사용하는 사업장에서 적절한 보호용구도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지만 사업장 변경 사유는 아니라는 답변을 들었다. E씨는 일하던 사업장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나 동료들이 크게 다치거나 사망하는 등 불안과 공포가 극심한 상태지만 사업장 변경이 되지 않아 같은 일터에 계속 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아산이주노동자 센터 우삼열 소장은 "현장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은 '도저히 못견디겠다'고 절규하는데 한국 정부가 정한 몇가지 사유에 맞지 않으면 사업장을 바꿀 수 없다"며 "현대판 노예제로 비판받은 산업연수생 제도와 무엇이 다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용허가제에 대한 헌법소원은 2007년에도 제기된 바 있다. 다만 당시에는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이 도입되기 전이라 사업장 변경 횟수를 제한한 조항의 위헌성이 쟁점이었다. 이에 대해 헌재는 2011년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