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주 대형쇼핑몰 화장지 매대가 사재기로 텅 비어있다. (사진=권민철 특파원/자료사진)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빠르게 번지면서 이른바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국·유럽 등지에서조차 극심한 생필품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예외다. 위기를 함께 이겨내야 한다는 공동체적 시민의식과 정부의 민주적인 대응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간 덕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먹거리 등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두는 사재기는 해당 물건이 시중에 제대로 공급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커다란 불안감에 기인한다. 현대인은 국가 단위 공동체 안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만큼, 그 시스템을 향한 사회적·개별적 불신이 결국 사재기와 같은 현상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사회학자인 홍성태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생존이 달린 문제와 맞닥뜨린 개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과 정부 홍보·언론 보도 사이에 큰 괴리가 생길 때 시스템을 불신하게 된다"며 "특히나 감염병 사태처럼 모두가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경우에는 올바른 정보가 제공돼야만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한국 사회는 현재 객관적인 차원에서 정부가 과하다 싶을 만큼 정확한 정보를 빠르게 제공하고, 주관적인 차원에서 이를 올바른 정보라고 판단한 국민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적극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사재기 등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서 사재기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적인 예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부·언론 등을 통해 남북 관계가 얼어붙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어김없이 라면 등 생필품 사재기 뉴스가 메인을 장식했다.
심리학자인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은 "우리는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위기에 시달려 온 측면이 있다. 나라가 곧 망하기라도 할 듯이 위기를 조장하면서 권력을 쌓고 유지해 온 세력이 있기 때문"이라며 "오랜 세월 이러한 흐름 안에 있다보니 허탈함과 더불어 기득권층을 향한 의심이 커진 것인데,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됐다고도 볼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러한 부정적인 경험과 더불어 촛불혁명처럼 국민들이 연대와 단합을 통해 시련을 이겨낸 긍정적인 경험이 합쳐지면서 문제가 생기면 개인보다는 공동체적인 움직임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심리가 형성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문제가 생겼을 때 혼자 살아남는 방법을 생각하기보다는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심리 때문에 사재기를 안 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고 진단했다.
김 소장은 "현대 한국 사회도 서구와 마찬가지로 개인주의화 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사를 보면 연대하고 단합해 승리해 온 경험이 많다. 이것은 공동체 의식을 해체되지 않도록 만드는 최후의 보루"라며 "국가에 해결책을 요구하고, 그것마저 안 되면 직접 들고 일어나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내면의 자신감이 특히 촛불 이후 팽배하다"고 봤다.
같은 맥락에서 홍 교수 역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만들어지는 기간은 50~100년을 봐야 하는데, 우리네 고난의 근현대사가 불굴의 근현대사였다는 데서 이를 설명할 수 있다"며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최악의 억압과 독재, 매국이 있었지만 그에 맞서 불굴의 의지로 민주화를 이뤄 온 흐름이 선명하다"고 설명했다.
◇ 코로나19 이후 한국…"사회 개혁 속도 붙는다""우경화 탓에 공동체 내부 분열과 불안, 불신에 시름하는 미국·일본 사회보다 코로나19 사태 극복에 있어서 한국이 앞서가는 현상은 100년에 걸친 민주화 역사 속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홍 교수의 지론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가능케 한 힘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동참이다. 홍 교수가 세계 최고 수준의 지식·정보 사회로 성장한 한국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기 때문에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통찰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 특히 우리 삶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난 10여 년 동안 아주 잘 벼려 왔다고 본다."
그는 "그렇게 깨어 있는 시민들이 조직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고,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기술이 그 조직화를 실현하고 있다"며 "여론을 조작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실을 확인하고 공유함으로써 그 조작의 실체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그 단적인 예"라고 전했다.
한국 사회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면 사회 개혁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데 두 학자는 한목소리를 냈다.
김 소장은 "코로나19 사태로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자도생을 강요받아 온 사고 방식이 보다 공동체 지향적으로 흐를 수 있다"며 "미국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에 대한 환상 역시 깨지면서 한국 사회는 지금 '공익을 우선시하는 사회로 전환하지 않으면 생존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학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코로나19 사태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파편화시키는 신자유주의·시장주의가 지극히 위험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공동체와 연대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며 "그간 뜬구름 잡기 식으로 여겨져 온 기본소득의 경우도 '국가가 마음 먹고 사회가 합의하면 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전반적인 사회 개혁을 추동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홍 교수도 "현대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대중 사회다. 여기서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야 하는 정치와 언론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현재 낡은 언론들의 수구성과 퇴행성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제도적 개혁이 철저하게 추구될 것이다. 또한 핵심 과제로 꼽히는 검찰·사법 개혁이 이뤄지려면 21세기에 맞지 않는, 보수·진보라는 낡은 틀을 깨는 정치 개혁이 전제돼야 한다. 우리는 지금 엉터리 보수뿐 아니라 엉터리 진보 문제도 적나라하게 목격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정상정치'와 '비리정치'로 정치 틀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코로나19 사태 이후 정치의 정상화, 정상정치의 새로운 구조화가 강력하게 추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