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25일 오후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3) 할머니가 지난 7일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문제점을 폭로한 이후 3주가 지났다. 정의연과 전 대표인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논란은 '정국의 핵'으로 부상했다. 정의연의 회계부정 등 각종 의혹을 지적하는 목소리와 위안부 운동 자체가 폄하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들이 교차했다.
30년 동안 이어진 위안부 운동은 중대한 갈림길에 선 모양새다. 정의연과 윤 당선인에게 불거진 문제들이 수사의 영역으로 넘어간 가운데, 위안부 운동의 방향성과 지속가능성 등은 우리 사회에 큰 과제로 남았다. 이번 사태가 보여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CBS는 원로 운동가와 학계, 전문가 등을 통해 위안부 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해봤다. 그 첫 순서로 위안부 운동 30년사(史) '빛과 그림자'를 살펴봤다.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1441차 정기 수요시위‘ 가 열리고 있다.(사진=황진환 기자)
◇1990년 간판 올린 정대협, 쉬쉬했던 위안부 문제 '공론화'"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한일간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발족한다."
1990년 11월, 37개 여성단체가 위안부 피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의했다. 정의연의 전신 정대협이 간판을 올린 순간이다. 다음해 8월에는 한국 최초로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가 용기있는 기자회견으로 피해를 증언했다. 이후 고(故) 김복동, 이용수 할머니 등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나섰다.
정대협의 등장은 해방 이후 쉬쉬해왔던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일조했다. 단순히 개인의 피해가 아니라 민족적 차원의 피해로 인식되면서 피해자들이 공개적으로 나오는 성과를 이뤄낸 셈이다. 이신철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소장은 "국가적으로 외교 문제를 의식해 눈치를 보며 못했던 일을 정대협이 민간 영역에서 끌어 올린 측면이 있다"며 "위안부 문제가 식민지 여성 피해 문제로 보편적으로 인식되면서 공론화시킨 것은 정대협의 공"이라고 말했다.
정대협의 활동은 더욱 날개를 달았다. 1992년 1월부터 개최한 '수요집회'는 피해자와 시민을 연대하게 하는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세계적으로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국제사회 지지 여론을 이끌어 냈고, 2007년에는 미국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는 성과도 냈다.
정대협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발해 발족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과 2018년 통합해 정의연으로 출범했다. 첫 통합 이사장은 현재 논란의 중심에 선 윤미향 당선인이다.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441차 정기 수요시위‘ 에 참석한 정의연 이나영 이사장이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 정대협부터 정의연까지 '과잉 대표성'…배타성 문제도위안부 운동은 이처럼 정대협과 정의연으로 이어진 시민단체가 주축이 됐다. 그렇다보니 '과잉 대표성'이라는 문제에도 봉착했다. 운동의 모든 시선이 정의연으로 집중되는 상황에서 일종의 '권력화'는 불가피하게 된 셈이다. 정의연이 내세운 민족적 피해라는 큰 명제 안에서 정작 주인공인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묻혔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최근 불거진 '피해자 중심주의' 논란과도 맞닿아 있다.
여성학자 김정란 박사는 2004년에 작성한 논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정대협의 활동을 중심으로'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일차적으로 민족의 문제로 상정됨으로써 피해자들은 입을 열 수 있었으나, 목소리의 주인은 되지 못했다"며 "민족적 피해의 역사적 청산이라는 더 우선적인 과제 앞에서 그들의 구체적 경험과 입장은 주목되기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연장선상에서 불거진 대표적인 내부 갈등은 '위로금 수령'이다. 1997년 당시 일본 정부가 위안부 보상을 위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설립했다. 당시 정대협은 기금 수령을 반대했다. 위안부 피해자 석복순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한 활동가는 기금을 받으려는 피해자 할머니를 향해 "더러운 돈을 받으면 화냥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대협은 2004년 위안부 피해자 단체인 '무궁화자매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무궁화자매회 소속 위안부 피해자 33명은 "지금까지 당신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답시고 전국 각처에서 손을 벌려 거둬들인 성금이나 모금액은 전부 얼마입니까. 그 많은 돈 대체 어디에 사용했습니까"라며 정대협을 상대로 처음으로 횡령 의혹을 제기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에서 출연한 10억엔 역시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정의연은 보상금 수령을 막는 대신 '100만 모금 운동'을 전개해 피해자들에게 대신 성금을 지급했다.
김정란 박사는 이를 두고 "기금=부당한 돈이라는 공식을 설정하고 '거부' 이외의 어떠한 방법도 허용하지 않은 정대협의 전략은 일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제를 기정사실화했고, 피해자들 간의 분열을 심화시켰다"며 "거기에는 생존자들이 국민기금을 수령할 경우 할머니들은 흩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위안부 운동은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라고 분석했다.
그 과정에서 정대협의 '배타성'도 도마에 올랐다. 무궁화회를 이끌며 정대협을 비판해 온 위안부 피해자 고(故) 심미자 할머니의 이름이 남산 '기억의 터' 피해자 명단에 빠진 게 사례로 지목된다.
기금 수령과 관련해 정대협과 다른 견해를 가진 위안부 운동가 김원동(75)씨는 자신이 모셔온 위안부 피해자 고(故) 이귀녀 할머니의 지원금을 빼돌린 범인으로 지목됐다가 1, 2심 모두 무죄 판결을 받고 누명을 벗었다. 횡령범으로 몰린 배경에는 정대협이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관련 기사-CBS노컷뉴스 5월25일자 [딥뉴스] 위안부 운동가 김원동씨는 어쩌다 횡령범 누명을 썼나)
익명을 요구한 한 위안부 학자는 "정대협, 정의연으로 이어진 위안부 운동은 국민들의 자산이지만, 너무 민족중심적이고 한일 간 대결구도를 가져가면서 놓쳐버린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며 "자체적으로 시민사회 내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국면이 있었지만, 이를 놓치면서 이용수 할머니가 얘기하게 된 것인데 이 기회를 통해 운동 방향을 쇄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30년간 이어진 위안부 운동이 '피해자 지원'을 넘어 복합적인 층위를 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정대협을 시작한 여성단체가 목적에 두고 있는 '여성인권 신장'을 포함해 평화, 교육, 한일 관계 등 시민단체 내 다양한 시도와 인식, 활동들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를 활동가와 피해자의 대결 구도로 봐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 보편적 의제로 두고 운동하는 과정에서 진실규명, 역사적‧사회적 정의, 교육, 추모 추진 등이 정대협이 30년 운동사에서 구축한 원칙"이라며 "앞으로를 얘기하려면 지난 30년 운동을 얘기해야 하는데, 운동가와 피해자를 진실공방하듯이 대결시키는 구도가 현재 만들어진 것이 치명타가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의연의 과잉 대표성 문제 배경에는 정부의 '책임 방기'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신철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소장은 "국가가 이 문제에 대한 역할 자체를 잘 못하니까 민간이 과잉 대표가 된 것"이라며 "정부는 외교적, 정치적 고려로 손을 놓고 있고 국회 역시 관련 법안 통과를 내팽겨치면서 정대협으로 모든 책임이 지나치게 집중됐다"라고 말했다.
이어 "예를 들어 자본가(국가)와 노동자(피해자)의 문제가 '노노'(시민단체와 피해자) 갈등으로 전환된 것"이라며 "정작 원인제공자들은 뒤로 빠져서 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 (일러스트=연합뉴스 제공)
◇ '회계 부정' 깔끔히 털고 가야…'위안부 운동' 지속의 중요성이번 사태로 제기된 '회계 부정' 문제들은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윤미향 당선인과 정의연의 비리 의혹들은 확실히 털고 가야 한다는 시각이 중론이다. 운동에만 집중하는 관행이 회계 등을 부차적 사안으로 인식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윤 당선인은 정대협 간사와 2008년 상임대표를 거쳐 정의연 이사장 역임까지 긴 시간을 운동에 몸 담았다.
양미강 전 정대협 사무총장은 "이번 논란이 일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우리의 운동하는 방식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며 "시민사회가 앞만 보고 너무 과하게 일한다. 정대협도 재정적 문제가 너무 어려웠고, 그야말로 헌신으로 갔을 때가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위안부 운동을 향해 내달리고 기부금 규모와 사업이 확장되면서 피해자 할머니들이 느낄 수 있는 '소외'를 돌보지 못한 측면도 작용했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용수 할머니는 지난 25일 2차 기자회견에서 "30년 동안 이용만 당했다"며 격정 토로를 했다.
고려대 경영학과 이한상 교수는 "다른 단체들은 2~3년마다 대표가 바뀌며 감독을 다시하고 리셋하는 기회들이 있는데 윤 당선인은 오랜 기간 1인 체제가 되다보니 내부 통제 시스템이나 견제, 감시가 작동하지 않은 것 같다"며 "지배구조의 문제가 회계 문제로 드러났기 때문에 이사회도 개편하고 내부 통제 시스템도 설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문제를 짚고 넘어가되 위안부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용수 할머니의 인식이다. 이 할머니는 "폄훼와 소모적인 논쟁은 지양되어야 한다"며 "지난 30여년간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나타났던 사업 방식 오류나 잘못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화해와 용서, 연대와 화합을 희망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을 계기로 위안부 운동을 위협하는 '백래시(backlash: 사회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행동)' 움직임도 경계할 대상으로 꼽힌다. 극우단체 등 일부 세력들은 위안부 강제동원 등을 부정하는 발언 등을 잇달아 내놓는 모양새다.
강성현 교수는 "역사부정론의 파고가 몰아닥칠 것으로 보고, 여기서 끝나지 않고 혐오와 증오로 이어질 수도 있다"며 "피해자와 함께 운동 해왔던 지난 30년을 비판도 할 수 있지만 너무 과열됐고 정치 진영화된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위안부 운동 자체는 긍정 평가로 자리매김을 해줘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양미강 전 사무총장은 "논란 속에서 확인했던 것은 많은 국민들이 위안부 운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고, 계속 가야 한다는 대의가 있다는 것"이라며 "대신 현재까지 일어났던 여러 문제들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고, 법적인 문제를 빨리 정리를 해서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