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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야" "신상공개해"…피해자 2번 죽이는 '2차 가해'

사건/사고

    "왜 이제야" "신상공개해"…피해자 2번 죽이는 '2차 가해'

    • 2020-07-18 05:05

    2년 4개월 전 김지은씨의 안희정 前지사 고발 당시와 흡사
    "신상공개하면 믿어주겠다"지만…공개여부 관계없이 음해 난무
    피해사실 공개시점 문제삼고 신빙성 '재단'하며 피해자 공격
    김씨, 악플러 수십명 고소…박 전 시장 고소인도 2차가해 추가고소
    전문가 "피해자 목소리에 있는 그대로 귀 기울여야" 입 모아

    (일러스트=연합뉴스)

     

    "피해자들은 성폭력 트라우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주변 반응'을 가장 많이 꼽았다.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 피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질책 어린 시선들,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사건을 해결해나가야 할 시간에 위로는커녕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선에 상처받고, 덧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염장되어 잘 아물지 않은 상처는 흉이 크게 나기 마련이다."

    지난 2018년 3월 5일 JTBC '뉴스룸'에서 안희정 전 충청남도지사의 성폭력을 세상에 알린 김지은씨의 자전적 에세이 '김지은입니다'의 한 대목이다. 폭로 이후 정확히 2년 만인 지난 3월 5일 출간된 이 저서에서 김씨는 지난해 9월 9일 안 전 지사가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최종 확정받기까지 554일 간의 힘겨웠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여정을 담아냈다.

    안 전 지사를 가장 지근에서 보좌하는 수행비서였던 김씨의 분투는 1년 6개월 만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가 이 과정에서 감당해야 했던 '2차 가해'는 여전히 지루하게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김씨는 지난 5월 책 관련기사에 악성 댓글을 단 '악플러' 40명을 명예훼손·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피소 이튿날 실종돼 숨진 채 발견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을 고소한 전직 비서 A씨는 처음 입장을 밝힌 지난 13일 허위사실 유포 등 2차 가해에 대한 추가고소장을 서울지방경찰청에 접수했다.

    ◇"지금까지 뭐하다 이제 와서"…트집에 멍 드는 피해자

    김씨와 A씨를 비롯한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가장 흔한 '2차 가해'는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그 시점에는 왜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뒷북을 치느냐'는 힐난이다. 이 말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정말 그와 같은 피해를 입었다면, 지금까지 잠잠했을 리 없다는 편견과 의심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하지만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얽혀있는 '수직적' 역학관계에 대한 고려가 없기에 가능한 질문이라는 지적이다. 대체로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의 고용여부 등 거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사인 데다,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유명인사일 경우 대외적으로는 젠더 이슈에 전향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안 전 지사는 '미투'에 대한 공식적 지지를 표명한 당일 김씨에게 성폭력을 저질렀고, 박 전 시장은 젠더특별보좌관을 두는 등 '페미니스트'를 자임해왔다.

    실제로 김씨는 방송 출연 이튿날, 충남도청 인사과로부터 '금일 3월 6일자로 비서직 면직 절차가 진행된다'는 내용의 이메일과 문자를 받았다. 같은 날 충남도 남궁영 행정부지사가 "피해자 김지은씨에 대해서는 본인 의사를 존중해 거취를 결정한다"고 내놓은 발표와는 딴판인 조치가 취해진 셈이다.

    4년간 지속됐다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을 고소한 A씨 역시 지난 13일 한국여성의전화·한국성폭력상담소를 통해 발표한 입장문에서 "많은 분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많이 망설였다"고 밝혔다. 목소리를 내기까지 숱한 망설임과 후폭풍에 대한 장고(長考)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A씨는 연이어 "그러나 5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은 제가 그때 느꼈던 '위력'의 크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숨이 막히도록 한다"고 토로했다.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박 전 시장의 장례를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르는 데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60만 가까운 인원이 동의했음에도 박 전 시장의 장례가 당초 서울시 발표대로 강행된 데 대한 무력감을 털어놓은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김씨의 변호를 맡았던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A씨에게는 4년도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라며 "어마어마한 권력을 갖고 있는 차기 대권주자가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데 어디다 말해야 구제를 받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현명한 판단일지, 알려질 경우 뒷감당까지 많이 고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피해를 입은 그 다음날 바로 고소할 수 있는 사건은 지하철에서 당한 '몰카'나 기습 성추행 등 몇 가지 안 된다"며 "일회성 사건이면 바로 신고할 수 있지만, 이렇게 반복적으로 지속된 사건은 피해자가 말할 수 있는 기회도 어느 순간 많이 상실되고 피해자의 판단능력조차도 소실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맞다면 신상공개해라"…도(道) 넘어선 신빙성 공격

    성폭력 사실을 알리는 순간 피해자들에겐 '피해사실을 입증해 보라'는 시비도 심심찮게 들어온다. 여기엔 '신상을 공개하면 믿어주겠다'는 누리꾼들의 협박성 압박도 포함된다.

    A씨의 기자회견 이후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는 박 전 시장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자칭 미투 피해자는 신상을 밝혀라. 숨어서 나는 피해자라고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신상공개를 못하는 것은 가짜 미투" 등의 비난이 올라왔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A씨가 재직할 당시 서울시청에 근무한 직원들을 언급하며, A씨를 찾고 있다는 '신상 털기' 유도 글까지 게시됐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피해사실에 대한 신뢰를 담보로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신고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암수범죄'인 성폭력에 대한 몰이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서 변호사는 "신상공개 여부는 피해자의 선택이다. 지금까지 만나본 피해자들 중 얼굴을 들이밀고 '인터뷰 할래요' 하는 피해자는 100명 중 한두 명 있을까 말까"라며 "김지은씨도 확정 판결이 나고, 가해자가 교도소에 있음에도 예전의 일상을 살지 못한다. 이런 일로 유명해지고 싶은 피해자는 아무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얼굴을 알리면 알리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비난을 하는데 오직 성폭력 피해자에게만 가해지는 아주 희한한 가해"라며 "박 전 시장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안위'까지 신경을 쓰게 됐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피해사실을 알리는 피해자가 당분간 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앞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김씨 역시 '불륜', '꽃뱀' 등 무수한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점을 상기하면 신상공개가 피해자를 보호하는 방어막이 될 수 없음은 더욱 자명해진다.

    (사진=연합뉴스)

     

    ◇전문가들 "피해자의 목소리, 있는 그대로 귀 기울여야" 지적

    이같은 2차 가해가 무엇보다 위험한 건 피해자의 인권을 심각하게 위협할 뿐 아니라, 침묵할 수밖에 없는 다수의 피해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여성학자 권수현 박사는 "(성희롱·성폭력) 가해자는 사라져도 가해자의 편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직장에서 살아남는다"며 "지금 같은 2차 가해는 피해자들에게 '그래봤자 사라지는 사람은 피해자'라는 메시지를 줄 뿐"이라고 지적했다.

    직장 내 성희롱 구제조치와 관련해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 권 박사는 "실제로 피해자들을 만났을 때 '앞으로 이런 일을 겪으면 다시는 신고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며 "현재 한국사회의 노동환경은 피해자가 피해를 말했을 때 이전에 비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A씨의 변호인이 피해자의 노동환경이 어땠는지 계속해서 보고하고 있지 않나. 제대로된 노동환경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며 "(그럼에도 계속되는 2차 가해는) 박 전 시장을 떠받치는 거대 카르텔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직시하기 싫다는 의미"라고 꼬집었다.

    특히 전문가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천천히 귀 기울여주는 자세가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 변호사는 "A씨가 제기한 성추행 문제는 일종의 사회적 고발일 수 있다"며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여자의 말은 다 믿어줘라'라는 뜻이 아니다"라며 "최소한의 공감 능력을 갖고 경청해주고, 문제가 있으면 (진상을) 밝히고 개선하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숙명여대 법학부 홍성수 교수 또한 지난 1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른바 '피해자 보호 원칙'은 성폭력 관련 피해자가 처한 복잡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4년 동안 뭐 하다가'라는 악의적인 질문을 할 것이 아니라, 왜 4년 동안 서울시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못했는지를 물을 차례"라고 지적했다.

    이어 "결정적인 증거는 왜 제출하지 않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피해자에게 요청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피해자가 가진 증거는 이미 경찰에 다 냈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인 '증거'를 국민들에게 공개하라고 압박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홍 교수는 "한국에서 성희롱 문제 해결이 강성 규제 위주로 운영돼 온 것은 있지만, 대부분 해결방식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해결되지 못한) 성희롱 피해가 쌓이고 쌓이는 상황에서 신고를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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