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토 고산사가 소장한 원효대사 진영 모사본(사진=연합뉴스)
원효대사(617-686), 속성(俗姓)은 설(薛)로 신라에서 가장 저명한 승려 중 한 명이다. 한국인이라면 거의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원효대사는 일반 승려와는 달리 속세를 초월하고 자유로웠다. 그는 불법을 구하러 당나라로 가는 도중 되돌아왔고 이후 파계해 아들을 낳았다.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정말 이름을 떨친 이유는 불교에 대한 깊은 조예와 유가·도가를 융합해 내놓은 '화쟁(和諍)' 사상 때문이다. '화쟁' 사상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101년 고려 숙종 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것은 이를 입증한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효대사의 불교사상은 유가와 도가 등 중화문화의 요소를 흡수했을 뿐 아니라 이후 중국까지 전해져 중국 고승과 불교 인사의 추앙을 받았다.
중국 푸젠성 푸톈시 광화사에서 출판한 원효대사의 '금강삼매경론'(사진=인민화보 제공)
원효대사는 저술도 풍부하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화엄경소(華嚴經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은 당나라에 전해져 당나라 불교 문파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때 화엄종의 실제 성립자인 법장(法藏)선사의 수많은 저서에서도 원효대사의 관점을 인용한 곳이 여럿 보인다. 법장선사의 대표 저서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서는 원효대사의 이름인 '해동 신라국 원효법사'를 직접 언급하고 원효대사의 관점을 저서의 중점 토론 대상으로 삼았다.
송·요(宋遼)시대에는 원효대사에 관한 이야기가 송나라 초기 승려 연수(延壽)가 편찬한 불교 사적인 '종경록(宗鏡錄)'에 수록됐다. 천태종 지례(知禮)선사는 자신의 불교 논저에서 원효대사의 관점을 인용하고 논증했다. 고려국사 의천은 원효대사의 저서를 요나라 황제 도종(道宗)에게 올리기도 했다.
도종은 불교를 믿었을 뿐 아니라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원효대사의 저서를 읽고 매우 높이 평가해 이후 불교 관련 글을 쓸 때 원효대사의 관점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 밖에 원효대사의 '금강삼매경론'은 중국 역대 불교 연구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권위 있는 저작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원효대사의 불교 저서가 중국 승려에 의해 산스크리트로 번역돼 인도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원효대사의 불교사상이 전파된 것은 중한 문화, 더 나가 아시아 전체의 문화가 서로 연결된다는 필연성을 말해준다.
원효대사의 '화쟁' 사상이 강조한 것처럼 '부처의 뜻이 지극히 공정함을 전개하여 백 가지의 다른 주장을 화해시킨다(開佛意之至公, 和百家之異諍).' 즉 불교사상은 유가와 도가 등 다양한 사상을 융합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가 다르다고 대화와 융합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문화는 교류해야만 번영할 수 있고 소통해야만 서로를 알 수 있다.
※본 기사는 중국 인민화보사에서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