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설화가 현대로 넘어오자 주인공 역시 비극적인 숙명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찾으려 한다. '운디네'는 사랑과 운명, 신화와 역사, 도시와 호수가 주인공 운디네를 따라 유려하게 유영하는 영화다. 동시에 설화에 대한 신비롭고도 현대적인 재해석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운디네'(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운명이라 여겼던 남자 요하네스(야콥 맛쉔츠)로부터 실연당한 여인 운디네(파울라 베어) 앞에 다른 남자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사랑과 운명에 관한 드라마다.
영화는 '운디네' 설화를 기반으로 한다. 유럽 설화 속 운디네는 물의 정령으로 인간과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영혼을 얻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배신할 경우 그를 죽이고 다시 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닌 존재다.
운디네는 베를린에 사는 도시 역사가이자 박물관 투어 가이드 일을 한다. 운디네는 요하네스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후, 요하네스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그를 죽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해진 신화 속 운디네의 운명을 거부한 것이다.
요하네스와 이별한 날, 운디네에게 산업 잠수부인 크리스토프가 나타난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눈앞에 있던 수조가 깨진다. 깨진 유리와 흘러내린 물 사이에서 둘은 사랑에 빠진다. 운디네의 운명처럼 말이다.
(사진=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시작부터 무언가가 깨져나가기 시작하더니, 크리스토프에게 받은 작은 잠수부 인형의 다리가 부러진다. 이는 운디네에게 주어진 운명과 사랑의 속성이 비극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작은 암시는 예상치 못한 결말로 다가오게 된다.
운디네를 모티프로 하는 만큼 영화는 물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크리스토프조차 물을 기반으로 하는 직업을 가진 인물이다. 또한 영화에는 도시에 관한 이미지와 설명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크리스토프와 사랑에 빠진 운디네는 도심과 호수를 오간다. 특히 호수 속 모습, 호수에 나타난 거대한 메기, '운디네'라고 적힌 글씨 등 마치 설화의 한 자락이 호수에 잠겨 있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물 위 세상이 현실적이라면, 수면 아래는 여전히 신화가 존재하는 세상처럼 보인다. 마치 재개발된 건물들 아래 묻힌 옛 베를린 시대에 대한 비유처럼 말이다.
이처럼 '운디네' 속 설화, 사랑, 그리고 도시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고 새로운 것에 의해 옛것이 희미해진다는 공통점을 담고 있다.
운디네는 현대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과거의 역사와 신화를 지우고 세워진 것임을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습지 위에 세워진 도시, 역사와 신화를 땅 밑에 묻은 채 재개발을 거듭하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건 신화 내지 역사와 현재의 이질적이면서도 신비로운 공존이다. 땅 아래에 수많은 과거와 이야기들이 묻힌 재개발된 베를린, 운디네·크리스토프가 향한 산업화의 증거와 물 밑에 비밀스러움이 담긴 호수는 닮은 형태를 보인다. 경계에 놓인 두 장소는 현대로 넘어온 운디네의 숙명이자 도시의 숙명과도 같다.
(사진=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영화에 등장한 깨지는 이미지의 반복은 결국 자신을 온전히 마음에 담아준 크리스토프와의 이별로 이어진다. 운명을 거부했던 운디네는 요하네스를 죽이고 죽음의 위기에 놓였던 크리스토프를 삶으로, 도시로 건져낸다. 그리고 운디네 자신은 호수로 돌아간다.
이렇듯 '운디네' 설화 속 운디네와 현대 운디네는 다른 점을 보인다. 설화 속에서는 남자들로 인해 주어진 비극과 운명에 따라야 했다면, 현대의 운디네는 예정된 길을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선택'을 한다.
초반에 요하네스를 죽이지 않은 점, 이후 실연의 아픔에서 벗어나 자유로움과 새로운 사랑을 찾은 점 등이 그것이다.
크리스토프가 죽음의 위기에 놓여 결국 운디네의 저주가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감독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운디네가 자신의 세계를 되찾았음을 보여준다. 타인의 시선으로만 존재하던 운디네가 마지막 장면에서 떠나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볼 때, 유일하게 카메라가 운디네를 비추지 않는다. 온전히 운디네의 시선으로 크리스토프와 세상을 바라본다.
운디네를 연기한 파울라 베어의 눈빛과 모습이 관객을 스크린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이 작품으로 파울라 베어는 평단의 찬사와 함께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90분 상영, 12월 24일 개봉, 12세 관람가.
(사진=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