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경기도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지에 안치된 정인이의 묘지에 시민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한형 기자
국민을 공분케 한 아동학대 사건들 이면에는 늘 제도적 공백이 있다. 가장 최근 일어난 '정인이 사건'의 경우 아동학대 신고를 세 차례나 받고도 초동대응에 실패한 경찰에 대한 비판이 크다.
단순한 분노만으로는 또 다른 '정인이'를 막을 수 없다. 아동학대의 '파수꾼' 격인 학대예방경찰관(APO)은 이미 경찰 내 대표적인 기피 보직으로 전락했다. 업무 피로도가 높은 데다, 자칫 잘못하면 민원에 시달릴 위험마저 크다는 게 일선의 인식이다.
경찰은 아동학대 사건 대응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담당 경찰관의 면책 규정 도입 △현장 출입・조사권 부여 △임시조치 절차 간소화 등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3번 학대신고에도 정인이 양부모 돌려보낸 APO, 기피보직으로 전락"아동학대 사건에 관련된 경찰 부서는 크게 'APO'와 '여성청소년 수사팀'이 있다. 경찰이 112를 통해 아동학대 사건을 접수하면 지구대나 파출소에서 출동한다. 이후 모니터링을 통해 APO가 가정방문이나 전화로 학대 여부를 확인한다. 만일 피해자의 학대가 의심된다면 각 서의 여성청소년 수사팀으로 수사협조를 요청하는 구조다.
이들은 정인이 사망을 계기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3차례나 아동학대 신고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경찰과 아동보호기관은 정인이를 양부모에게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서울 양천경찰서 소속 APO 2명은 정인이에 대한 학대 의심 신고가 이미 두 번이나 있었던 것을 알고도 세 번째 신고에 부실 대응했다.
일선 APO와 여성청소년과 소속 경찰들은 정인이 사건에 대한 당시 대처가 "적절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아동학대 사건을 직접 접하는 APO와 여성청소년 수사팀도 나름의 어려움이 크다"고 설명했다.
일선서에 근무하는 한 여성청소년과 과장은 "아동학대는 직접 증거가 없고 정황 증거가 대부분인데, 이럴 경우 혐의점을 판단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경찰관들이 의욕적으로 수사한다고 하더라도 부모들이 '아니다, 나를 왜 죄인 취급하느냐'고 하면 경찰관 입장에서 할 말이 없다"며 "기소됐는데 무죄를 받는 경우 '경찰관이 우겨서 그런 것'이라며 부모가 형사고발이나 민사소송을 진행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업무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개인이 감당하는 구조에서 적극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얘기다.
실제로 경찰청에 따르면 부처합동 점검으로 부모의 동의 없이 아동을 학교에서 면담했다는 이유로 해당 부모가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것도 모자라 아동학대로 입건된 뒤에는 담당 경찰을 협박으로 고소를 한 경우도 있었다.
보호자 없이 주거지에서 예고 없이 아동을 상담했다는 이유로 주거침입으로 담당 경찰을 고소한 뒤 국가인권위원회·국민권익위원회·청문감사관실·국민신문고로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한 사례도 있다.
또 다른 여성청소년과장은 "우리나라의 아동학대 관련 법률 자체는 선진적이다. 정서적 학대, 방임까지 규정이 돼 있다"며 "그런데 현장에서는 어디까지가 방임이고, 어디까지가 정서적 학대인지 판단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어 "야간이나 주말, 휴일 등에 들어온 신고는 바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연계가 되기도 어렵다"며 "경찰은 수사를 전담으로 해오던 기관이다 보니 아동학대 부분에서는 전문성에 한계가 있는데 전문가 없이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고 덧붙였다.
업무 부담과 피로도 역시 크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 APO는 669명이다. 256개 경찰서에 평균 2~3명이 배치돼 있다. 그런데 이들이 담당하는 업무 범위는 아동학대뿐 아니라 노인·장애인 학대, 가정폭력 사건까지 폭이 상당히 넓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APO는 대체적으로 기피를 많이 하고 장기간 근무하는 사람이 많이 없다"고 했다. APO 보직은 순경이나 경장 등 막내가 떠맡다가 1년 등을 채운 뒤 보직 변경을 하는 사례가 잦다.
김창룡 경찰청장이 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양천 아동학대 사망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에 앞서 숨진 정인 양의 명복을 빌고 있다. 이한형 기자
◇경찰청 "면책규정 신설해 책임우려 줄여줘야"경찰은 '정인이 사건' 이후 이같은 구조적 문제점을 고려해 면책규정을 신설하는 방안을 해법으로 내놨다. 과다한 책임과 민원 등에 시달릴 우려를 줄여주고 현장 경찰의 '적극성'도 높여주겠다는 취지다.
경찰청이 전날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야당 간사인 국민의힘 박완수 의원실에 제출한 '양천 아동학대 사망 사건 관련 법·제도적 필요 조치 검토'에 따르면, 경찰관이 직무수행 과정에서 아동학대 범죄를 알게 되거나 의심할만한 합리적인 사유가 있고, 오로지 해당 아동의 이익을 위한 목적하에 적극적으로 응급조치나 긴급 임시조치를 한 경우 정당행위로 간주하는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또 경찰관 직무집행법상 감면 규정을 신설해 '고의・중과실이 없는 한'은 형사상 책임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가정폭력 사범 의무적 체포 제도를 도입한 미국 위스콘신주에서는 경찰이 합리적인 판단과 선의의 노력에 따라 가해자의 체포 결정을 내렸을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아울러 경찰청은 △현장출입 조사권 부여 △임시조치 절차 간소화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현행 아동학대처벌법 제11조2항은 경찰이나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의 현장 출입・조사가 가능한 곳을 '신고된 현장'으로 명시한다. 그래서 신고현장 외의 장소에서는 피해 여부 등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이를 '신고된 현장 또는 피해아동 보호를 위해 필요한 장소'로 개정해, 더욱 넓은 장소에서도 조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피해 아동을 위해 접근금지나 퇴거 등 임시조치를 신청하는 경우 검사를 거치지 않고 법원에 직접 청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봤다. 현재는 수사팀에서 임시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도 검사를 경유에 법원에 청구하도록 규정돼어있다. 불가피하게 1~3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경찰청은 이러한 검토 내용을 7일 열리는 행안위 긴급현안 질의에서 전달할 계획이다. 결국 입법이 뒷받침 돼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국회는 우선 경찰의 잘잘못을 따져보겠다는 입장이다. 박완수 의원은 "정인이 학대 사망사건과 관련 제도적인 미비점도 일부 드러났지만 근본적으로 경찰의 대응이 부실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며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세부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할 것"이라고 밝혔다.
황진환 기자
◇전문가 "발빠른 대응 가능하지만, 전문성·분위기 쇄신 같이 가야"전문가들은 '면책특권'이 현장 경찰관들의 발빠른 대응을 가능케 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바라봤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전현욱 박사는 "아동학대는 굉장히 특수한 경우(범죄)고, 공권력의 조기개입이 필요하단 데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당연히 형성될 수 있다"면서도 "만약에 사후적으로 그런 개입이 필요 없었다고 확인이 되면 (경찰) 개인이 책임을 지게 되니 개입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면책특권이 보장되면 경찰 입장에선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가정 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피해자가 아동이다 보니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어 경찰은 자신의 조치가 적법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경찰 입장에선 '나중에 내가 책임지겠구나'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다. 사명감보다 현실적 직업인으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창원대 법학과 유주성 교수 또한 "사후적으로 법 집행기구로만 역할을 하려 하는 게 우리나라 경찰의 한계인데, 권한적인 측면도 보충이 되어야 할 것"이라며 "범죄 예방 측면에서 사전적으로 적극적 조치를 취할 수 있게끔 하는 문화도 필요하고, 그러한 권한도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면책규정이 당초 취지와 다르게 남용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는 보완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전 박사는 "그럴 일이 많진 않겠지만, 경찰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나 경우에 따라 안 좋은 의도를 갖고 권한이 남용될 수 있단 것에 대해 주의가 필요하다. 면책특권은 영장제도 등의 통제장치를 완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별도의 장치는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관련된 내용을 전부 기록하게 한다든지, 독립된 제3의 기관에서 이를 토대로 적정성을 판단할 시스템을 하나라도 갖추는 게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어 "(학대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징후들을 최대한 유형화한 다음 이런 유형이 의심될 경우 개입할 수 있다고 하는 식의 가이드라인을 좀 더 상세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며 "그럼 물론 해당 가이드라인을 현장에서 적용해야 하는 아동학대 담당 경찰관들이 보다 전문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사건을) 수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경찰 문화도 문제가 있다"며 "면책특권이 있으면 (보다) 과감하게 살펴볼 수 있겠지만, 어떻게든 공권력이 행사된 데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건 다소 위험할 수도 있다. 면책특권의 법적 절차와 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한 뒤 조기에 개입할 수 있게 하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단순한 권한 확대를 넘어 경찰의 '전문성'과 '분위기 쇄신'이 같이 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유 교수는 "경찰이 하는 역할에는 '범죄 예방'의 기능도 있는데, 아동학대를 너무 수사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며 "구체적인 정황과 학대 의심은 있지만 증거가 없어 수사가 안 되는 경우가 문제가 생기는데, 범죄 예방적·사전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하는 문화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