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시작해 30일 종영한 엠넷 런트립 리얼리티 '달리는 사이'.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오마이걸 유아, 이달의 소녀 츄, 하니, 선미, 청하. '달리는 사이' 공식 홈페이지
조연출 시절부터 여성 연예인 위주 프로그램을 여럿 거쳤다. 2018년에는 배우, 아이돌 멤버, 솔로 등 다양한 여성 연예인의 관계 맺기와 우정 쌓기에 집중한 '비밀언니'라는 리얼리티를 선보였다. 여성 연예인의 비보를 연달아 들었던 2019년 말, 각자의 힘듦을 가진 이들을 모아 서로 힘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미쳤다. 엠넷 '달리는 사이'는 그렇게 출발했다.
지난달 8일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달리기에 포커스를 맞춰 생각하던 분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달리기하면서 서로 친밀감을 높이고 마음을 나누는 것도 중요했다"라고 한 박소정 PD 말에서 알 수 있듯, 출연진이 가까워지고 공감을 나누는 게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었다. 팀을 꾸릴 때 '비밀언니'를 함께했던 오정 작가가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정 작가 역시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달리는 사이'로 다시 한번 뭉쳤다.
CBS노컷뉴스는 최근 종영한 엠넷 런트립 리얼리티 '달리는 사이'의 박소정 PD와 오정 작가를 지난 7일 전화 인터뷰했다. 보다가 울었다는 소감을 꽤 자주 들었다는 두 사람은, 출연진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공감을 표한 시청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 정도로 깊이 있게 자기의 모든 얘기를 꺼낼지는 예상 못 했다"라며 끈끈하고 단단한 합을 보여준 출연진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달리는 사이'는 박 PD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 이들을 응원하는 자신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제가 업계에서 뭐를 바꿀 순 없지 않나. 이런 기획을 해서 계속 응원하고 싶은 친구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라며 "이걸 할 사람은 오정 작가님밖에 없다 싶었다. '비밀언니' 때는 서로 위안되는 언니 동생 관계에서 나오는 이야기였는데, 확장해서 좀 더 많은 친구들에게 좀 더 많은 위로와 케미를 보고 싶었다. 그걸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이 작가님이었고"라고 말했다.
'달리는 사이'를 연출한 박소정 PD. 엠넷 제공
오 작가는 프로그램 취지에는 공감했으나 초반에 조금 주저하는 부분이 있었다. 오 작가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을 때 방송을 통해서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과연 맞는가?' 하는 것을 두고 심도 있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달리는 사이'에서는 뭔가를)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이 친구들의 빈 부분을 채웠으면 했다. 그게 제작진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고"라고 설명했다.
'달리는 사이'에는 선미, 하니, 오마이걸 유아, 청하, 이달의 소녀 츄가 나온다. "친구들 사귀려고"(유아), "자고 싶을 때 자고 어디에 있든 숨 쉬고 싶을 때 숨 쉬고 멍 때리고 싶을 때 멍 때리고 그런 정신적인 여행"(청하), "달리면서 공기를 쐬면서 친해지고"(츄) 등 각자 출연 계기가 있었다. 선미는 프로그램에 진심으로 임할 수 있는 친구들이 왔으면 좋겠다고 밝혔고, 하니는 본인이 달리기하면서 느낀 기쁨과 행복을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에 합류했다. 이 다섯 명은 '달리자 달달구리'로 하나 돼 달렸다.
제작진은 '달리는 사이'에 다양한 연차 친구들이 모이길 바랐다. 박 PD는 "폭넓은 연차로 섭외하려고 고심했다. 그래야 내 이야기도 편하게 털어놓으면서 '나도 이때 이랬지' 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2007년 데뷔한 선미(14년차), 2012년 데뷔한 하니(9년차), 2015년 데뷔한 유아(6년차), 2016년 데뷔한 청하(5년차), 2017년 데뷔한 츄(4년차)까지 두루 모였다.
이전 '비밀언니'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선미와 하니의 존재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오 작가는 "하니씨는 달리기를 경험한 친구다. '달리기라는 소재가 과연 될까?' 할 때 확신을 더 해줬다는 걸 꼭 얘기하고 싶다. 선미씨는 6~7년 정도 봤는데 사람 대하는 태도가 늘 한결같다. 하니씨가 '달리기'를 맡는다면, 선미씨는 '사이' 부분을 확실히 담당해 줄 거라고 봤다. 믿고 가는 두 사람이었다"라고 밝혔다. 박 PD는 "진행자도 없다 보니 언니 라인(선미-하니)이 중요하다고 봤다. 저희가 신뢰하는 친구들이었고, 프로그램을 잘해나가는 자양분 같은 역할을 했다"라고 설명했다.
선미, 하니, 유아, 청하, 츄는 '달리는 사이'에서 '함께' 달렸다. '달리는 사이' 캡처
유아, 청하, 츄에 관한 이야기도 부탁했다. 박 PD는 "유아씨는 무대를 보면 색깔이 되게 분명해서 어떤 친구일까 궁금해서 만나봤는데 생각이 너무 깊었다. 사실 좀 놀랐다. 내 것을 끄집어낼수록 안 좋은 피드백이 와서 되게 소극적으로 변한 친구 중 한 명이었는데 그런 걸 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그걸 깨고 간 것 같아서 저희로선 뿌듯하다"라고 답했다.
이어 "청하씨는 무대 위에서는 엄청 끼를 발산하는데 평소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너무 궁금했다. 방송에 어떻게 비칠지 고민과 걱정이 많았지만, 멤버들하고 합이 잘 맞았고 진솔하게 본모습을 풀어놨다. 되게 속이 깊지만 은근히 재미있기도 했고. 츄씨는 너무 귀여운 친구라 사랑받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언니들이 이 정도로 어화둥둥 하고 하트 눈이 될 줄은 예상 못 했다. 사랑 많이 받고 줄 줄도 아는 사람이랄까. 해피 에너지를 가진 친구여서 언니들의 마음 장벽을 허문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첫 만남 당시만 해도 어색함 때문에 이따금 침묵이 찾아왔던 다섯 명은 첫 번째 달리기를 하고, 함께 러닝 북을 쓰고, 저녁 식사를 같이 준비해 나눠 먹으면서 차츰 마음의 거리를 좁혔다. 예상치 못했지만, 이들은 만난 지 고작 하루 이틀 만에 속내를 털어놨다.
유아는 늘 뭔가를 하고 채워야 한다는 강박과 앞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하루를 늘 망쳐와 힘들었다고 밝혔고, 청하는 생각이 많다는 이유로 '너 되게 시간 많은가 보다' 하는 힐난을 들었던 경험을 전하며 그럴 때마다 "생각 없을 정도로 더 달려야지" 했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멈추면 그 경기 퇴장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는 청하에게 하니 역시 "여유는 나태함의 상징이라고 생각해서 여유를 가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라며 '못 멈췄던' 지난날을 돌아봤다.
박소정 PD가 꼽은 '달리는 사이'에서 인상적이었던 말. 왼쪽은 마지막 날 달리기를 하며 '걱정 없이 달렸다'라고 한 이달의 소녀 츄. 오른쪽은 마지막 날 밤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자'라고 한 선미. '달리는 사이' 캡처
츄는 무대와 방송을 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계속 떨어진다며 "잘하는 게 없는 것 같은?"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츄에게 "너도 너무 친절해서 나중에 네가 많이 아플 수 있어. 난 그게 제일 걱정 돼"라고 말한 선미는 둘째 날 밤 경계선 인격 장애(정서·행동·대인관계가 매우 불안정하고 변동이 심해 감정 기복이 큰 것이 특징)를 겪었다가 나아졌다는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박 PD는 "'달리기'라는 소재를 가져온 건, 뭔가를 같이 하면서 감정을 공유하면 힘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함께 땀 흘리면 동지애 같은 게 생기지 않나. 같은 직군의 여자 친구들이 모였으니 공감하고 위로할 게 많을 것 같다고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깊이 있게 자기의 얘기를 꺼낼지는 예상 못 했다"라고 말했다.
제작진이 개입을 최소화한 덕이었다. 숙소 촬영 때는 거치 카메라를 설치했고 직접 촬영이 필요할 땐 거리를 두었다. 박 PD는 "이런 촬영을 자주 안 해 봐서 그런지, '(출연진이) 하나도 신경 안 쓰이고 우리끼리 한 것 같다'라고 얘기하더라"라고 전했다. 오 작가는 "리얼하게 몰입하기 위해 세심하게 판을 깔아야 했고, 그만큼 많은 제작진이 고생해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출연진) 매니저나 회사 쪽에서도 '왜 그렇게 진행하세요?' 하는 게 전혀 없었다"라며 감사를 표했다.
러닝 크루끼리 통화하고, 선물을 준비하고, 편지를 쓴다든가, 같이 해 보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해 보는 '친구42 리스트' 등 다양한 장치를 준비한 건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오 작가는 "제작진이 끼어드는 건 이 친구들이 원하는 리얼리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라며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런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도입했다"라고 전했다.
'달리는 사이'에는 달릴 때마다 러닝 메시지를 전달하며 그날의 감정을 돌아보게 하는 러닝 DJ 장윤주가 등장했다. 달리기를 매개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러닝 북도 있었다. '달리는 사이' 캡처
러닝 DJ도 '달리는 사이'에만 있는 역할이었다. 러닝 DJ는 '달리는 사이에 찾은 답은 무엇인가요?', '함께 달리며 느낀 것을 들려주세요' 등 가슴을 파고드는 질문을 던졌고, 선미·하니·유아·청하·츄는 진지하게 자기만의 답을 적어 내려갔다. 다들 "너무 목소리가 좋다"라고 극찬한 러닝 DJ의 정체는 모델 겸 방송인 장윤주였다.
박 PD는 "러닝 DJ가 중추 메시지를 전달하는 입장이어서 고민이 되게 많았다. 섭외했을 때부터 힘을 실어주셨다. 장윤주씨는 우리보다 인생을 좀 더 살아본 언니고, 좀 더 물어보고 싶고 뭔가 알려줄 것 같은 분이지 않나. 여성들이 모여 연대하고 프로그램 취지에 공감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라고 말했다. 오 작가는 "테스트용으로 목소리 녹음한 걸 다 같이 들었는데 '이거다!' 했다. 러닝 메시지가 생소할 수 있는데, 목소리 듣자마자 확신을 갖게 됐다"라고 부연했다.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한 모습 뒤 감춰져 있던 고뇌와 걱정, 불안과 고민을 당사자가 직접 말한다는 건 '달리는 사이'의 특별한 점 중 하나였다.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음에도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은, 의식하지 못한 채로 '지나치게 열심히 사는'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건드렸다. 치유와 같은 순간도 있었다. 비슷한 경험을 먼저 한 이들이 뒤따르는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에서는 다정함이 묻어났고, 자기를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태도에서는 기대감을 발견했다.
'달리는 사이'에서 나온 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게 뭐냐고 묻자 박 PD는 선미의 "어떻게든 살아내자고 말하고 싶어"와 츄의 "진짜 걱정 하나 없이 달렸다!"를 들었다. 박 PD는 "힘든 걸 이겨낸 친구(선미)가 그 말을 해 줘서 좀 더 울림이 있었던 것 같고, 그 말을 함으로써 파급력이 생기니 좋은 에너지가 되길 바랐다. 달리기라는 걸 통해서 누가 밀고 계획하지 않더라도 내가 이걸 끝낼 수 있구나, 하는 작은 성취를 느끼길 바랐는데 츄씨가 그걸 해낸 것 같아 반가웠다"라고 말했다. 오 작가는 특정한 구절을 꼽는 대신 "이게 만약 드라마였어도 이런 대사는 절대 못 쓸 것"이라고 했던 현장 반응을 전했다.
하니는 "숨이 찰 때 속도를 낮춰도 된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달리는 사이' 캡처
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한 걸음씩 떼는 이들의 '활기'가 화면을 채운 '달리는 사이'는 달리기 의욕을 북돋는 데도 공들인 프로그램이었다. 제작진이 가장 신경 쓴 건 '컨디션'이었다. 즐기면서 뛸 수 있기를 바랐다. 팀 닥터도 두어 컨디션을 체크했다. 근육이 놀라지 않게 달리기 전 스트레칭하는 모습이 여러 번 나갔고, 뛸 때의 기분을 드높이는 플레이리스트도 나왔다. 박 PD와 오 작가는 선미 플레이리스트였던 밴드 실리카겔의 '9'를 추천곡으로 꼽았다.
서산 신창저수지, 아산 영인산 자연휴양림, 태안 기지포 해수욕장, 포항 해파랑길 등 코스를 소개하고 지도를 만든 건 진짜 '달려보길' 권하고 싶어서였다. 박 PD는 "아름다우면서도 사람이 정말 없는 곳이어야 했다. 그래야 이 친구들이 좀 더 자유롭게 뛸 수 있으니까. 뛰는 모습을 보며 시청자분들도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끼길 바랐다"라고 말했다.
4부작의 짧은 프로그램이었지만, '달리는 사이'는 '울면서 봤다'라는 후기가 끊이지 않았다. 박 PD는 "많은 분들이 내 얘기를 하고 싶고 누군가 들어줬으면 좋겠고 공감이 필요하다고 느낀 게 아닐까. 그런 장면을 보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라고 답했다. 오 작가는 "다들 사는 게 바빠서 스스로를 점검할 기회가 잘 없지 않나. 저는 러닝 메시지를 쓸 때 '이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썼는데,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걸 보고 다들 자기 삶을 돌아보는 것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구나 했다"라고 말했다.
"이 친구들이 저희한테 고맙단 말을 되게 많이 했어요. '모아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사실 프로그램 만드는 입장에서 아무리 여러 가지를 고려해 매칭하더라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고 시작하는데 이렇게 마음이 잘 맞았던 게,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마지막 촬영할 때도 너무 아쉬워했어요. 코로나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여행 가자고 얘기했대요. 방송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힘이 되는 동반자가 된 것 같아 뿌듯했어요. (…) 프로그램 관련 좋은 얘기를 더 많이 들은 건 꽤 오랜만이라 '아, 이래서 내가 방송을 하지' 생각 많이 했어요. '두고두고 보고 싶다'는 분들도 있었는데 연출자로서 그만큼 힘이 되고 감동적인 말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저도 조금의 확신을 얻게 됐어요." (박소정 PD)
"행복, 건강이 되게 뻔한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그런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생각했어요. '달리는 사이'를 하면서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었어요. 시청자분들도 그런 프로그램으로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오정 작가)
오마이걸 유아는 "내가 하고 싶은 거, 내가 생각이 드는 거를 인정해 주는 것,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걸 처음 느꼈다"라고 고백했다. 청하는 달리고 나서 "올해 중 가장 답답하지 않은 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달리는 사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