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 의원 페이스북 캡처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우선한다는 성폭력 대응의 대원칙에 비추어, 피해당사자인 제가 공동체적 해결을 원한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저와의 그 어떤 의사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저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가해자에 대한 형사고발을 진행한 것에 아주 큰 유감을 표합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지난 26일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시민단체 활빈단이 같은날 정의당 김종철 전 대표를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고발하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활빈단은 고발장에서 "정당사상 유례없는 공당 대표의 추악한 망동에 당원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경악과 충격을 받았다"면서 "사퇴와 직위해제로 끝날 일이 아닌 만큼 성추행 가해자인 피고발인에 대해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장 의원은 "저의 일상 복귀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는 경솔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피해당사자로서, 스스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상을 회복하고자 발버둥 치고 있는 제 의사와 무관하게 저를 끝없이 피해 사건으로 옭아넣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며 "입으로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말하면서 실상은 피해자의 고통에는 조금도 공감하지 않은 채 성폭력 사건을 자기 입맛대로 소비하는 모든 행태에 큰 염증을 느낀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장 의원은 "법적 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여러 경로로 밝혀왔다. 정의당 역시 장 의원의 뜻을 존중해 당 차원의 징계 절차를 밟고 있었다. 김 전 대표는 지난 25일 당대표직에서 사퇴한 상태다
정의당 김종철 전 대표. 윤창원 기자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제3자인 시민단체의 고발은 '법적으로' 유효하다. 지난 2013년 법 개정으로 성추행(강제추행) 범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수사기관이 수사에 나설 수 있었던 '친고죄' 규정이 폐지됐기 때문이다.
본래 친고죄 규정은 성폭력 피해 경험과 피해자의 신상 등이 외부에 노출돼 또 다른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도입됐다. 고소 여부를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해 피해자의 사생활과 명예를 보호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가해자의 합의 종용으로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사실을 피해자의 지인이나 직장 등 외부로 알리거나, 전화나 메일 등으로 끊임없이 연락을 취하며 정서적 피해를 주기도 했다. 1년이라는 고소 기간 내에 형사고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시간적 제약도 컸다.
더구나 수사기관에서도 고소 취하 가능성으로 인해 수사에 소극적으로 임하게 되는 등 부작용이 많았다. 결국 2013년 '피해자의 권리 보호'라는 대명제 아래 친고죄 규정을 폐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친고죄' 유무를 떠나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관점이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SNS에 "친고죄가 폐지됐다고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고발할 수 있고, 경찰에서 인지 수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다만 그런 경우는 '피해자가 나설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며 "피해자가 자유로운 의사표명을 하기 어렵거나 문제해결을 원치 않는 특수한 사정이 있는지 살피라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애초에 사법절차가 아닌 다른 공적인 기구를 통한 해결을 하고자 하는 피해자를 무조건 경찰서로 끌고 가자는 말이 아니다"며 "피해자가 사법절차보다 조직 내 해결을 더 신뢰하거나 바란다면 이런 해결을 시도하고, 가능하지 않으면 사법절차로 가면 된다"고 덧붙였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신지예 대표는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게 제일 중요하다"며 "이번 사건 같은 경우는 장 의원 본인이 형사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정확히 이야기했는데 시민단체가 무리하게 고발을 진행한 것 같다"고 밝혔다.
다만 신 대표는"자신의 목소리와 의사를 정확히 밝힐 수 없는 다수의 피해자도 있는 만큼 매 사안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세밀하게 살필 필요는 있다"며 "친고죄가 폐지된 이유도 고려해야 한다. 공동체적 해결은 정의당이 아닌 일반 단체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피해자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진행될 수사는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여성변호사회의 인권이사를 맡은 서혜진 변호사는 "성폭력 사건은 CCTV가 그대로 찍히거나 목격자가 존재하기가 어렵다. 수사의 시작점이 피해자의 진술이 될 수밖에 없다"며 "피해자의 자의적인 협조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면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정의당이 관련 브리핑을 진행하면서도 구체적인 피해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건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해준 것이라 본다"면서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공인이자 정치인이고 고발이 진행된 만큼 '공동체적 해결'을 넘는 대처방법을 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혐의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피해자 진술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피해자 협조가 어려울 경우, 고발이 들어오더라도 끝내 각하될 가능성이 크다.
수사를 맡고 있는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피해자의 의사와 2차 가해 우려 등도 종합적으로 파악해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