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쪽방촌의 모습. 황진환 기자
서울에서 제일 값비싼 그러나 가장 열악한, 쪽방촌에도 볕이 들까.
평당 임대료(10~20만 원 수준)만큼은 강남 뺨치는 쪽방촌에 개발 시동이 걸리고 있다.
기존 쪽방 주민들의 내몰림을 막기 위해 공사 기간에는 따로 조성된 이주단지에서, 공사가 끝나면 단지 내 공공임대주택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선(先)순환' 구상도 반영됐지만, 이를 반길 수 없는 주민들도 있다.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던 그 집, '공공임대주택'이 되면?
영등포 쪽방촌의 모습. 황진환 기자
설 명절을 앞둔 서울 영등포역 근처 쪽방촌 뒷길에 걸터앉아있던 주민 A(33)씨는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다. 현재는 동거인과 함께 살고 있지만, 장래는 불투명하다.
A씨는 "개발이 시작되는데 (공공임대주택 입주) 자격이 안 된다면 (노숙인) 센터나 사우나 같은 데서 생활하지 않을까 싶다"며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B(64)씨는 "창피하니까 잘 얘기를 안 하려 하지만 말소된 경우도 흔한데, 그런 사람들이 정확히 얼마나 있는지는 통장님도 잘 모를 것"이라며 "어느 날 일 하러 가자고 했는데 '형, 나는 말소돼서 못해'라고 말하면 그제야 알아차릴 뿐"이라고 말했다.
채무 등 각종 사유로 거주 불명 상태가 주민등록 말소로 이어지면서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주민들이 쪽방촌에 있다.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열악한 주거지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능했던 포용이다.
문제는 이들이 기초생활보장급여나 각종 의료보험 혜택에서 제외되는 것뿐만이 아니다.
쪽방촌을 밀어버리고 새로 지어 올릴 공공임대주택 입주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것이다.
◇공공임대 포함한 단장…'모두의 재정착'엔 먹구름
영등포 쪽방촌 토지이용구상(안). 국토교통부 제공
정부는 지난해 1월 영등포 쪽방촌을 정비해 영구임대주택, 신혼부부 행복주택, 민간분양 등 1200호 규모의 주거‧상업‧복지단지로 탈바꿈시키겠다고 밝혔다.
이 중 영구임대주택은 370호 규모로, 기존 쪽방 주민들을 우선해 입주시키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A씨와 같은 주민등록 말소자가 그 대상에 포함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1월 계획 발표 이후 주민공람 시점의 거주민들을 최대한 포함하려고 한다"면서도 "기존의 쪽방을 헐고 새로 공공임대주택이 들어서는 만큼 다른 공공임대주택에 준해 입주 자격을 따져야 하는 상황인데,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입주자 선발에 앞서 당국이 말소자들의 주민등록을 다시 살리는 방향으로 이끌 예정"이라며 "그밖에도 특정 시점 이후 입주하신 분들도 순위는 낮더라도 우선공급 대상으로 포함할 수 있을지 포괄적으로 고민 중"이라고 설명했다.
개발 계획 발표 1년여가 지난 현재는 지구계획 수립을 위한 절차가 진행 중이다. 내년 초 실제 조성공사 착공에 앞두고 입주민 선발에 아직 시간이 남긴 했다.
하지만 기초생활보장급여도, 의료 혜택도 포기하는 주민등록 말소에는 '나름'의 절박한 사정이 있다. 이에 일찌감치 짐을 싸서 떠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쪽방촌 거주민들은 말한다.
◇'소셜믹스'에 불안도…무료급식 등 쪽방민 돌봄시설, 기능 이어갈 수 있을까
영등포 쪽방촌의 모습. 황진환 기자
이들이 떠나는 이유에는 이른바 '소셜믹스'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임대주택과 분양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1만㎡ 부지는 이들에게 '하나'가 아니다.
쪽방 거주민 C(58)씨는 "전부 다 임대를 주는 게 아니라 저긴 일반(민간분양과 행복주택 등)이고, 여기만 쪽방 사람들이면 여기는 여기, 저기는 저기가 되는(구분되는) 것"이라며 "보기 안 좋고 마음도 불편해 그냥 떠날 참이다"고 말했다.
주민등록 말소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 소셜믹스 포비아로, 개발 계획 발표 이후 쪽방촌을 떠나는 이유는 이처럼 각양각색이다.
정부는 무료급식소 등 기존 쪽방촌 거주민 돌봄시설이 새로운 단지에도 정착되도록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회의적인 견해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진환 기자
7년 넘게 이곳 영등포 쪽방촌 등지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프레이포유' 손은식 목사는 "기초생활급여도 포기할 정도로 이 사회 가장 밑바닥에 있는 분들이나 공사 과정을 못 견디는 이런저런 이유로 쪽방촌을 떠나버리는 사람이 늘면 그러한 시설도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사라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집주인 등과 협의해 깨끗하게 리모델링을 하면 기존 주민이 정착해 사는 데 무리가 없을 텐데, 이러한 개발로 인해 오히려 하던 사업이, 삶이 무너지더라도 찾아올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사라지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쪽방상담소가 확보한 명단에 따른 쪽방 주민 수는 지난해 발표 당시 360여 명, 지난해 12월 기준으로는 386명가량에 달했다. 단순 현황 집계로, 그 구성원은 다 다를 수 있다.
주민등록이 없는 사람도, 계획 발표 이후 새로 이사 온 사람도 우선은 포함된 명단이다. 1월 명단을 기준으로 임대주택이 우선공급된다면 쪽방에서 나온 입주자 수는 이러한 전망치보다 크게 줄어들 수 있다.
◇그 많던 쪽방민들은 얼마나 남을까
지난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강당에서 열린 ‘공공주도 3080+ 대도시권 주택공급 획기적 확대방안 브리핑’을 마친 후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영등포 쪽방촌 뒷길에는 '주민 동의 없는 개발은 적폐 중 적폐' '토지와 주택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다'는 붉은 현수막이 달려 있었다.
지난 5일 당국이 서울역 근처 쪽방촌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개발 계획을 발표하자 이곳 토지‧건물주들은 "사유재산권을 박탈하고 토지‧건물주를 개발 행위 결정에서 완전히 배제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이에 정부는 "공공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쪽방촌을 정비하지 않으면 재개발 자체가 추진되기 어려워 공공주택특별법으로 수용해 정비하는 방식을 적용한 것"이라며 "토지‧건물 소유자에게는 현 거래시세를 고려한 감정평가 가격으로 정당 보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먼저 착공되는 공공주택 부지에는 현재 쪽방 주민 150여 명과 일반주택 세입자 100여 세대가 살고 있는데, 이는 용적률 상향을 통해 최소화했다"고 덧붙였다.
황진환 기자
한편 영등포 쪽방촌 거주민 D(62)씨는 "여기는 서울시장 자리가 비워지고는 사업이 무산됐다"고 다소 엉뚱한 말을 했다. 이전에 열렸다던 주민 설명회에 대해서는 "땅 주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가니까 나는 끼지 않았다"며 "나는 그저 여기 있으면서 귀동냥으로 조금씩 알게 되니 괜찮다"고 말했다.
손 목사는 "봉사 활동을 하면서, 개발을 비롯해 어떤 불리한 상황이 생겨도 민원도, 신고도 없이 그냥 떠날 뿐인 사람들이 '사회 최약자'의 정의가 아닐까 싶었다"면서 "새로 지어지는 단지가 이 쪽방촌에 살던 그 사회 최약자들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 곳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