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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4‧3 학살터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제주4‧3, 짓밟힌 꽃망울②]
    '시신 범벅' 머릿속 각인된 참상
    총탄 맞고도 엄마 품에서 살아나
    평생 죄책감에 트라우마 시달려
    "어린 아이까지 죽여야 했나"

    70여 년 전 제주 4‧3 당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만 1만4천여 명. 희생자 10명 중 2명은 방어 능력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군‧경은 젖먹이에게도 총구를 겨눴다. 제주CBS는 그동안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혔던 이들의 비극을 조명한다. 30일은 두 번째 순서로 학살터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을 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젖먹이‧임산부도 죽였다…제주4‧3 아동학살 '참극'
    ②제주4‧3 학살터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계속)


    지난 11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초등학교에서 고완순 할머니(82)가 4·3 당시 군의 기관총 사격이 이뤄진 운동장을 가리키고 있다. 고상현 기자

     

    "학교 운동장을 향해서 총소리가 '다다다다다' 났어. 우리 어멍(엄마)이 '아이고 완여야, 완순아 머리 땅에 박앙(박아서) 기라'고 소리 질렀어. 얼마간 있다가 총소리가 멎었어."

    "어멍 찾잰, 땅을 짚으난 손에 찐득한 피가 벌겅하게(붉게) 묻은 거라. '어멍, 피 묻어서 무섭다'고 소리 지르니깐 우리 동생도 덩달아 '어멍 집에 가자' '집에 가자'며 막 운 거라. 군인이 시끄럽다고 몽둥이로 동생 머리를 두 번이나 쳐버렸어…."

    지난 4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자택에서 만난 고완순 할머니(82)는 연신 "내가 소리 안 질러시믄 우리 동생 안 죽어신디"라고 자책하며 눈물을 흘렸다. 4‧3 당시 9살 소녀였던 고 할머니는 여전히 70여 년 전 '그날'의 기억에 갇혀 있다.

    ◇"시신들 범벅"…9살 소녀 머릿속에 각인된 '참상'

    4‧3 당시 고 할머니는 북촌리에서 어머니(이맹순)와 세 살배기 남동생(고영택), 15살 언니(고완여)와 함께 살았다. 해방 전 어머니가 부산에서 장사하느라 떨어져 지낸 터라 고 할머니는 한시도 어머니 치마폭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지난 4일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자택에서 고완순 할머니(82)가 4·3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숨진 남동생 얘기가 나오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고상현 기자

     

    "어멍 또 어디 가버릴까 봐, 잠들 때까지 치마폭 잡앙 어멍 옆에만 차지해서 욕심부렸는데, 1949년 1월 17일일 거라. 아침에 일어나 보니깐 어멍이 어서(없어). 어멍 어디신고 찾는데, 어멍이 급히 집에 들어와서 '우리 모두 다 죽었져'하고 통곡하는 거라."

    '1949년 1월 17일'은 북촌리 주민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이날 아침 일찍 마을 인근 고갯길을 지나던 2연대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2명이 숨졌다. 군인들은 그 보복으로 마을 사람에게 총을 겨눴다.

    "폭풍전야 같았어. 옆집에 사는 아주망이 무섭댄 하멍 두 살배기 아기랑 함께 우리랑 같이 방에 곱은(숨은) 거라. 군인들이 이 집 저 집 돌면서 불을 막질렀어. 연기가 들어와서 그 아기가 울어버리니깐 군인이 우리를 끌어낸 거라."

    그렇게 고 할머니 가족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갔다. 이후 학교 울타리에 설치됐던 기관총이 불을 뿜더니 운동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노약자들이 총탄에 쓰러졌다. 만삭의 몸이었던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완순 할머니(82)가 4·3 당시 옴팡밭으로 끌려갔을 때 목격한 장면을 직접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고상현 기자

     

    군인들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관총 세례에서 살아남은 마을 사람 300여 명을 옴팡밭(오목하게 쏙 들어간 밭) 등지로 끌고 가 총살했다. 고 할머니 가족은 사격 중지 명령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세 살배기 남동생은 군인의 매질로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이듬해 4월 결국 숨졌다. 9살 소녀가 겪었던 학살의 참상은 평생 머릿속에 각인됐다.

    "군인들에게 떠밀려서 옴팡밭을 들어가신디, 입에 발이 걸쳐진 사람, 엎어진 사람, 앉아서 죽은 사람, 돌담에 걸쳐져 죽은 사람 범벅이라. 지금도 그쪽으로는 안 지나다녀. 무섭고 죄책감이 느껴지는 거야. 나는 살아있으니깐…."

    ◇학살서 살아남아도…평생 몸‧마음 괴롭힌 '4‧3'

    군인들에게 총을 맞고 살아남은 '젖먹이'도 있다. 1949년 2월 1일 생후 17개월에 어머니(현정생)와 함께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에 끌려갔다가 홀로 살아남은 오인권 할아버지(75)가 그 주인공이다. 오 할아버지의 양팔과 가슴에는 지금도 '그날'의 상처가 남아 있다.

    "아버지(오명언)가 경찰이셨어. 1947년 3‧1절 발포사건 이후로 경찰들이 양민들을 탄압하니깐 그만두셨다고 하더라. 그 길로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공항)에서 총살됐어. 어머니와 나도 아버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터진목에 끌고 가서 총살했어. 나만 용케도 살아남았어…."

    지난 6일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 학살터에서 오인권 할아버지(75)가 상념에 잠겼다. 4·3 당시 생후 17개월이었던 오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끌려왔다가 홀로 살아남았다. 고상현 기자

     

    당시 오 할아버지는 어머니 시신 품에서 꼼지락대다가 군인들에게 발견됐다. 군인들은 오조리 이장에게 "하늘이 살렸다"며 아이를 건넸다. 오조리 이장은 인근 성산포 마을에 찾아가 친척인 故 신계춘 씨 집에 아기를 맡겼다. 신 씨의 딸 고순자 할머니(82)는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때 인권이를 보니깐 피투성이였어. 우리 어머니께서 목욕시키고 내 옷을 입히려고 하니깐, 어린 마음에 '옷 입히지' 말라고 울면서 떼썼던 기억이 나. 어머니께서 인권이를 등에 업고 성산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군 천막 병원에 치료받으러 다니셨지."

    다섯 살까지 신씨의 세 자녀와 친남매처럼 자란 오 할아버지는, 4‧3이 진정 되던 1951년 12월 조부모가 수소문 끝에 손자를 찾으면서 고향인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마을로 돌아갔다. 생후 17개월 때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4‧3은 한평생 오 할아버지의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부모님의 부재 속에 살아간다는 게 참으로 힘들었어. 부모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해서 꿈이라도 한 번 나타나 달라고 수십 년을 기도했는데 안 나타나시더라…." "길 가다가도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져. 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거라. 어릴 때 충격이 남아있는 거지…."

    생후 17개월 때 총탄에 맞은 오인권 할아버지의 왼쪽 팔에는 지금도 깊은 흉터가 남아 있다. 고상현 기자

     

    ◇"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까지 죽여야 했나"

    취재진이 만난 고 할머니와 오 할아버지는 4‧3 당시 이념도 몰랐을 뿐 더러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아동 또는 젖먹이였다. 그런데도 군‧경은 이들을 학살 터로 끌고 갔다. 4‧3 광풍 속에서 살아남더라도 그들은 평생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함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고 할머니는 인터뷰를 마치며 취재진에게 이렇게 울분을 토했다.

    "보수고 진보고 떠나서 사람 죽이고 싶고 벌을 주고 싶으면 죄를 가려서 죽이든지, 감옥을 보내든지 해야지. 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까지 죽여야 했냐는 거라. 타국이 우리나라를 점령해서 괴롭힐 때 국민을 보호하라고 있는 게 군대인데. 우리는 군인들 손에 죽었잖아."

    지금은 여든이 넘은 '9살 소녀'는 국가에 묻고 있었다.

    '북촌리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영아들이 묻힌 너븐숭이 애기 돌무덤. 고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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