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 전 제주 4‧3 당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만 1만4천여 명. 희생자 10명 중 2명은 아이들이었다. 군‧경은 12살 소녀를 고문하는가 하면, 젖먹이에게도 몽둥이질했다. 제주CBS는 그동안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혔던 이들의 비극을 조명한다. 31일은 세 번째 순서로 4‧3 당시 아동에게 자행됐던 가혹 행위를 보도한다. [편집자 주]
정순희 할머니(86)가 4·3 당시 고문당했던 일을 얘기하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고상현 기자
"심심하믄 나를 노리개 삼아서 두들겨 패고 고문해서."
지난 7일 서귀포시 강정동 자택 인근에서 만난 정순희 할머니(86)는 70여 년 한 맺힌 눈물을 쏟으며 이렇게 말했다. 정 할머니는 "그때 가만히 내버려 둬시믄, 아프지도 않고 죽을 건디"라고 한탄했다. 지금은 여든이 넘은 '12살 소녀'에게 들이닥친 4‧3은 무시무시한 악몽과 같았다.
◇마구 때리는 것도 모자라…전기‧물고문까지4‧3 당시 정 할머니는 12살 소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문을 당했다. 1948년 11월, 군인들의 지시로 17살 오빠(정동호)가 친구들과 함께 무장대가 신작로에 쌓은 담을 허물러 갔다가 행방불명되면서 '도피자 가족'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훗날 전해 듣게 됐지만, 오빠는 담 치우러 가는 길에 군인들로부터 매질과 총격을 당하는 과정에서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킥킥' 대며 장난치던 친구를 때린 군인에게 "아이들인데 웃을 수도 있지 않냐"고 대들었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군‧경은 정 할머니를 강정초등학교 인근 곡식창고로 끌고 가 한 달간 '오빠가 어디에 있느냐'고 추궁하며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일삼았다. 당시 15살이었던 언니(정옥희)도 법환지서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정순희 할머니가 고문당한 곡식창고가 있었던 서귀포시 강정초등학교 후문 인근 공터. 고상현 기자
"나를 심어다가(잡아다가) 오빠 이신디(있는 곳)를 고르랜(말하라고) 하는 거라. 오빠 담 치우러 간 거밖에 모르는디. 문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두들기는 거라. 힘에 버치면(부치면) 전기고문이라. 쇠꼬챙이로 팔, 허벅지 같은 데를 찌르는 거지. 온몸에 고름이 좔좔 흘러서(흘렀어)."
"또 어느 날에는 고춧가루 섞인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는 거라. 내가 '콱' 하고 기절하면, 쇠꼬챙이로 입을 벌리게 해서 또 고춧가루 물을 들이부어. 이 짓을 반복했어. 내가 12살 때부터 앞니가 없어. 완전 노리개라 노리개…."
◇세 살배기 아동 돌에 수차례 메쳐 죽이기도4‧3 당시 군‧경은 다른 아동을 상대로도 몽둥이질 등 가혹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들이 '폭도'로 규정지은 사람들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학살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제주시 조천읍 북촌초등학교에서 기관총 사격 직후 세 살배기였던 故 고영택 군이 엄마를 찾으며 울음을 터뜨리자, 한 군인이 시끄럽다며 몽둥이로 머리를 가격했다.
고완순 할머니(82)가 제주시 북촌초등학교 울타리 인근에서 4·3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고상현 기자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고 군의 누나인 고완순 할머니(82)는 "영택이가 '어멍(엄마) 집에 가자'며 막 우니깐, 옆에 있던 군인이 시끄럽다며 몽둥이로 머리를 두 차례 쳐버렸어"라고 말했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고 군은 누나와 함께 학살터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결국 이듬해 4월 숨졌다.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굴 학살 과정에서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1949년 1월 16일 경찰은 굴속에 숨어 있던 납읍리 주민 29명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세 살배기 아동을 메다쳐 죽였다.
당시 애월면 직원으로 강제 동원돼 학살 현장을 목격한 故 임병모 씨는 생전에 "거의 아기엄마들이야. 부녀자들. 전부 쏴 버렸는데. 젖먹이가 있었어. 한 순경이 그 아기의 양다리를 두 손으로 잡아가지고 돌에 몇 차례 메쳐 죽였어"라고 증언했다.
◇한평생 고문 후유증…12살 소녀 삶 앗아가
정순희 할머니는 군‧경의 모진 고문에도 살아남았지만, 한평생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외상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고문에서 풀려난 뒤인 1948년 12월 17일 서귀포시 강정동 '메모루 동산'에서 어머니(임두생)가 총살당하는 것을 강제로 지켜본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순희 할머니의 어머니가 희생된 서귀포시 강정동 메모루 동산. 정 할머니가 학살터를 가리키고 있다. 비닐하우스가 들어선 곳이 학살 장소다. 고상현 기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까지 잃은 정 할머니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이후 아기를 돌보는 아기업게를 하는 등 고생하며 살았다. 4‧3은 정 할머니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또 다른 의미의 학살이었다.
"고문받았던 거 생각하믄 지금도 밤에 잠을 자질 못 해. 그 생각만 하당 날이 밝아. 몸이 안 아픈 데가 어서(없어). 손목의 혈관도 다 끊어져서 욱신욱신 거려. 4‧3 말만 해가믄 신경이 막 올라와…."
정 할머니의 사연은 시로도 남겨져 있다. 시인이기도 한 제주4‧3연구소 허영선 소장의 <소녀와 쥐와 고양이와>라는 시다. 시 속에서 12살의 정 할머니는 곡식창고에 갇혀 고문을 받는 상황에서도 어머니를 애타게 찾고 있다.
'그들이 긴 쇠붙이를 갖다 댈 때마다 / 내 몸은 찌륵 찌륵 오그라졌어 / 한 밤을 보내고 또 보내면 엄마가 올까 / 어디서 어머니 목소리 들렸어 / 울지마라 / 순아'
12살 때 당한 고문으로 혈관이 찢어졌던 정순희 할머니의 왼쪽 손목. 정 할머니는 지금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고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