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했던 B29폭격기에서 찍은 한국전쟁 사진. 미국 NARA(국립문서보관청)는 이 사진에 대해 "한국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활동중인 적의 목표물에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면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이 폭격기의 폭탄투하 사진은 극동공군 제19폭격대 B-29 슈퍼포트에서 이 부대의 150번째 전투 모습을 찍은 것이다. 19폭격대는 한국전 발발부터 비행했다"는 설명글을 달았다. 출처: 국립문서기록청(NARA)한국전쟁 때 미국이 원자폭탄 공격을 검토했다는 것은 국내외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알려진 이야기다. 미국에서도 최근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은 서적이 출간돼 관심을 모은다.
동아시아 전문가인 A.B. Abrams은 '요지부동의 목표(Immovable Object)'라는 신간에서 당시 긴박했던 순간을 방대한 주석과 함께 시간 순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
Abrams의 신간 'Immovable Object' 표지 이 책에서 눈길을 끈 부분을 간추리면 이렇다.
▶50년 7월 28일 트루만 대통령, B-29(핵무기 10개 탑재능력 보유) 괌 전진배치.▶50년 12월 24일 맥아더, 핵공격 계획안 제출. 북한·중국 전역 26개 핵폭탄 투하 목표지역 선정. 8개는 군집결지 및 공군기지, 18개는 공업지역.▶51년 3월 10일 맥아더, D-데이 지정 요청. 만주에 투하할 원자폭탄 50개 요구.▶51년 4월 5일 합참의장, 맥아더에게 핵무기 사용권 첫 부여(그 이전까지도 원자력위원회와 합참은 맥아더의 과거 행태를 봤을 때 그가 선제적이고 도발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우려). 합참의장, 만약 많은 중공군이 투입되거나 폭격기들이 이륙할 경우 즉각적인 핵공격하라는 지침 하달.▶51년 4월 5일 원자력위원회 고든 딘 위원장, 원자폭탄(Mk.4) 9개 공군 제9 폭격단(핵폭탄 투하단)에 수송 승인.▶51년 4월 6일 트루먼 대통령,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에게 Mk.4 폭탄을 원자력위원회에서 군으로 전개하도록 승인.▶51년 10월 미국, 허드슨항 작전(Operation Hudson Harbor) 돌입. 구형 원자폭탄 보다 작고 다루기 쉬운 신형 원자폭탄의 향상된 실전배치 능력 수립 목적. B29, 북한의 북쪽 상공에서 비행훈련 진행. 모형 원자폭탄 등 투하 실험. 핵폭탄 조립·투하 등 실전 능력 측정.실제로 이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은 미국의 국립문서기록청(NARA)에 보관돼 있는 당시 문서들로도 확인된다.
캘리포니아 민주당 간부 로버트 힐리어가 1950년 11월 30일 백악관에 보낸 전문. "중국에 48시간내 철수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응하지 않으면 그들 위에 원자탄을 투하해 중국 군대가 점령한 북한의 모든 생명체를 파괴해 주시라"는 내용이 보인다. 트루먼 대통령의 기자회견 전 미국의회에서도 원자탄 투하 요구가 쇄도하면서 국민여론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NARA 먼저 백악관에는 1950년 11월 말부터 원자폭탄을 북한에 투하하는 문제를 놓고 미국 국민들의 찬반 의견이 쇄도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전쟁서 핵폭탄 투하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한 전후에 접수된 전문(telegram)들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날 기자회견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해 "군사적 상황에 따라 모든 수단을 고려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도 의미하느냐"는 기자들의 확인질문에 "언제나 원자폭탄 사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려해왔다"고 답했다.
따라서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에 '사전' 접수된 여론을 참고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다만 NARA 보관문서 가운데 기자회견 '이후' 도착한 전문에는 원자폭탄 투하에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더 많았다.
1950년 미국의 필립 제섭 특사가 미영 정상회담 내용 보존을 위해 작성한 비밀기록. 두 정상은 한국전 원자탄 투하에 대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돼 있다. 나눈 의견을 공동성명에 넣자고 했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사람의 말이 좋지 않으면, 그 것을 글로 남기면 더 좋지 않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공동성명 마지막 부분에 "트루먼 대통령은 세계정세가 결코 원자폭탄의 사용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들어갔다. 출처:NARA 12월 들어서는 국제사회의 우려도 높아졌다. 트루먼 대통령과 영국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간 정상회담에서도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이견이 노출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 사용에 열려있다는 입장이었으나 애틀리 수상은 이에 반대했다. 12월 7일 두 사람의 회담 내용을 전해들은 미국 필립 제섭 특사는 당시의 회담을 이렇게 기록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애틀리 수상에게 원자폭탄 사용 문제를 논의했다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문제와 관련해 양국은 늘 파트너였고, 영국의 동의 없이는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애틀리 총리에게 환기시켰다."이들 두 종류의 문서와 별도로 국무부가 미국의 해외정책을 연도별로 펴낸 연감(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에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 또는 중국을 상대로 한 원자폭탄 공격과 관련해서는 미국 정부 내에서 최소 20차례 논의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같은 사정을 감안할 때 미국 국방부내에서 논의된 것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무부 연감에 남아있는 원자폭탄 투하 관련된 부분은 찬반과 그 논리, 트루먼 대통령의 원자폭탄 사용 가능 입장의 배경, 투하시 유엔 등 국제사회와의 관계, 원자폭탄 투하시 위험부담 등에 대한 것들이다.
50년 11월 4일 국무부 폴 니츠 정책기획관의 1급 비밀메모. "한국에서 원자폭탄이 사용된다면, 전술적으로 병력진지, 포병지원 진지 목표에는 효과적이겠지만 그 같은 목표가 많지 않다. 그래서 원자폭탄 사용이 아주 제한적이다. 이러한 군사적 목적으로 원자폭탄을 사용한다면 중국군 참전을 억제시킬 수 있다. 전술적으로 사용된다면 민간인 희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출처: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ume VII, Korea 50년 11월 4일 국무부 비밀문서는 원자폭탄 투하시 예상되는 어려움으로 한국전쟁에 소련의 개입을 촉발시킬 수 있고 아시아에서의 반발이 커질 수 있음을 제시했다.
11월 8일 국무부내 논란을 정리한 비밀문서의 제목은 '중국에서 원자폭탄 사용'이다. 이 문서는 중국에서는 폭탄투하 지점이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용을 고려해야하며, 그럴 경우 유엔 제재, 국제사회로부터의 정치적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가장 많이 논의된 때는 50년 11월 중국이 한국전쟁에 전격적으로 가세한 직후다.
이후 원자폭탄 투하 가능성은 휴전 직전까지도 검토가 이어졌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2개월 전인 53년 5월 6일 백악관 NSC회의에서도 후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적의 공군력을 격퇴하는데 원자폭탄의 효과가 얼마나 되는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원자폭탄에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은 핵무기 사용이 그 만큼 매력적인 카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자폭탄을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카드를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중국이나 소련에 전쟁 억지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원자폭탄 투하의 정치적 후폭풍에 부담을 느끼던 미국정부는 '허드슨항 작전'이라는 이름의 모의원폭 투하실험만 하다 휴전협정을 맞이하게 됐다.
국무부의 비밀문서 가운데 흥미로운 지점은 이승만 대통령이 언급된 부분이다.
51년 7월 17일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가 맥아더 장군의 후임자인 매튜 리지웨이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간의 대화를 정리해 본국에 올린 전문에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인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38선의 기억을 지우기를 원한다며 왜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냐고 질문해서, 리지웨이 장군은 그 것은 단지 3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킬 뿐이라고 답했다."더욱이 트루먼 대통령과의 잦은 의견 충돌로 해임된 맥아더 장군 역시 핵무기 사용을 원했다는 대목에서는 한국전쟁에서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아 3차 세계 대전을 막았다는 안도감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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