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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작렬]차마 점령군이라 부르지도 못한다면

기자수첩

    [뒤끝작렬]차마 점령군이라 부르지도 못한다면

    선거판 초입에 등장한 해방정국 '불편한 진실'…여야 1위 후보간 충돌
    美 '맥아더 포고령'에 점령군 명시…이후 신탁통치도 제안하며 분단 씨앗
    선거 유불리 떠나 과거 직시해야…한미관계 업그레이드 위해서도 필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국회사진취재단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국회사진취재단
    해방 전후사의 인식만큼 우리 역사에서 논쟁적인 주제가 있을까? 일제의 가혹한 식민 수탈에서 갑자기 해방된 조선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또 다른 압도적 외세와 맞닥뜨렸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곧 극심한 혼돈에 휘말려 분단과 전쟁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가 한반도 냉전구조로 굳어져 오늘날 우리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70여년이 흐른 지금도 객관적 평가가 어려운 이유다.
     
    이재명 경기도 지사의 '미 점령군' 발언도 그런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미군이 일제 패망 후 한반도 38도선 이남에 점령군으로 입성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미군은 1945년 9월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에서 점령(occupy) 목적을 분명히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 부역자들을 미 군정에 중용함으로써 한국민의 의사를 무시했다. 이 지사가 "(친일 청산을 못하고)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한 배경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국회사진취재단윤석열 전 검찰총장. 국회사진취재단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역사 왜곡' 비판은 오히려 사실의 왜곡이다. 윤 전 총장은 "그들은 대한민국이 수치스럽고 더러운 탄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고 맹비난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따지고 보면 '미 군정'(Military Government)이라는 이름 자체가 점령군 역할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미 군정은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도 '개인 자격' 약속을 받고서야 뒤늦게 허용했다. 중국 충칭에서 상하이로 이동한 것은 1945년 9월이지만 정작 고국 땅을 밟은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뒤였다. 이는 정규 역사교육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해 12월의 찬탁·반탁 충돌은 더 뼈저린 사건이다. 이 사태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반대했다는 동아일보의 오보로 촉발됐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질 즈음에는 이미 극심한 분열과 대립으로 민족역량이 소진된 뒤였고 분단의 비극을 막을 수 없었다. 이처럼 1948년 정부 수립 전까지의 미군이 점령군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라 불러야 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는 또 다른 영역이다. 해방 전후사는 정치인에게 여전히 민감한 문제이고, 자칫 치명타를 입을 수 있기에 가능한 피해가는 게 상책이다. 그런 점에서 선거판 초반의 역사 공방은 매우 낯선 풍경이다. 일각에선 방역과 민생이 급한데 백해무익한 논란이라며 양측 모두를 힐난하고 있다. 이념대립을 촉발해 선거판을 퇴행시키고 한미관계에도 부정적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여야 1위 후보끼리 기왕에 한판 붙었다면 어떻게든 끝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두 후보의 역사관은 언제가 됐듯 검증이 필요했다. 다만 맥락을 무시한 말꼬리 잡기나 객관적 사실을 떠난 이념 공세는 철저히 배격돼야 한다. 후보 간 유불리를 떠나 선거라는 공간을 통해 불편한 역사적 진실을 직시할 수 있다면 한국 사회의 내공이 보다 깊어질 것이다. 한국은 이제 그럴 자격이 충분하고 한미관계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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