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당연히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페미니즘이다. 별 거 없다. 같은 맥락에서 '좋거나 나쁜' 페미니즘도 없다. 당연히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방식이 충분하지 않거나 관행에 찌들어 불평등한 구조를 재생산하는데 동참할 수는 있기 때문에 '부족한' 페미니즘은 존재할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하지만, 남녀는 물론 인류 전체가 어떤 특징 때문에 차별 받지 않아야 한다는 페/미/니/즘 자/체/는 나/쁘/지/않/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에서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주장의 맨 앞을 장식해야 하거나 "제가 추구하는 페미니즘은요"하고 구구절절 서두를 늘려야 한다. '래디컬 페미니즘=나쁜 페미니즘'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최근 입당한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가 2일 국회에서 만나 손을 잡고 있다. 윤창원 기자누가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을까. 일단 유력한 대선후보부터 이렇다.
"페미니즘도 건강한 페미니즘이어야지, 선거에 유리하다고 집권 연장에 악용되어서는 안된다", "저출산 문제의 여러 가지 원인에 대해 얼마 전에 무슨 글을 봤다. 페미니즘이 너무 정치적으로 악용돼서 남녀 간 건전한 교제 같은 것도 정서적으로 막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2일 발언)
귀를 의심했다. '건전한 교제' 같은 예스러운 표현은 차치하고, 윤 전 총장이 말한 '건강한 페미니즘'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윤석열 캠프 측 김병민 대변인은 "젠더 갈등에 편승하지 말고 여성의 권익 신장과 관련해 정치권이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이고, 그런 게 '건강한' 페미니즘이라는 의미"라며 "이런 논란을 정치적 공방으로 끌고 가는 게 나쁘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들 아는 진리이지만, 설명이 길어지면 앞선 발언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 한 건물 옆면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씨를 연상케 하는 '쥴리의 남자들' 벽화가 그려져 있다. 박종민 기자그렇다면 정치적 공방으로 끌려간 페미니즘이란 것을 보자.
'쥴리 벽화'가 있다. '쥴리의꿈', '영부인의꿈'을 운운하는 이 벽화는 전형적인 꽃뱀 서사,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 권력자 옆에 가는 것이 여성으로서 가장 성공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암시했다는 점에서 명백히 잘못됐다. 표현의 자유? 약자를 향한 배설은 그 범주 안에 넣어선 안된다.
이에 대해 윤 전 총장과 국민의힘이 벽화를 비판한 것, 야권 유력주자에 대한 엄호가 진짜 의도라고 해도 충분히 낼 수 있는 메시지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여기서 정치적 유불리가 존재한다고 윤 전 총장의 비판이 틀리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잘못한 쪽은 논란의 정점이 하루 지나고 나서야 비판 입장을 낸 더불어민주당이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8일 국회에서 열린 신임 대변인단 임명장 수여식에서 양준우 대변인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반대로 국민의힘 양준우 대변인의 '안산 선수의 남혐 발언' 언급을 보자. 민주당이 바로 공세를 퍼부었다. 민주당의 메시지? 틀리지 않았다.
이번에 잘못한 쪽은 "양 대변인의 맥락을 보라"며 뒷짐을 진 국민의힘 쪽이다.
이런 건 페미니즘이 악용된 사례들이지, '건강하거나 나쁜' 페미니즘을 구분 짓는 사례가 아니다. 메신저의 의도가 무엇이든, 공방이나 비판의 '내용'이 쟁점이 돼야지 비판의 '주체'가 누구냐는 논란은 전형적 물타기에 불과하다.
비판의 대상은 건강한 혹은 좋은 페미니즘과 나쁜 혹은 래디컬 페미니즘을 나누고 취사 선택하는 정치권이어야 한다. 벌써 몇 번째 강조하지만, 나쁜 페미니즘이란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