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TV 시장 1, 2위를 다투는 삼성전자와 LG전자는 TV와 가전 시장에서 오랜 앙숙이자 라이벌입니다. 삼성전자의 QD-OLED 시장 진출을 앞두고 증권가에서는 양사의 협력 가능성이 솔솔 흘러 나옵니다. 2010년대 차세대 OLED 시장을 둘러싸고 벌인 양사의 혈전은 과연 '휴전'을 넘어 '종전'에 이를 수 있을까요. 산업을 읽는 인더독 시리즈, 그 10번째 순서는 삼성-LG '동맹설'로 들어가 봅니다.
2006년 글로벌 TV 1위로 올라선 삼성…LG, OLED로 승부수
2013년 4월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삼성디스플레이의 아산·천안·기흥 본사와 사업장 등 4곳에 수사관을 보내 압수수색을 벌였습니다. 당시 LG가 처음 양산에 성공한 TV용 대형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 기술의 유출과 관련된 혐의였습니다. 1년 전 촉발된 양사의 디스플레이 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겁니다.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 삼성디스플레이 제공삼성과 LG, LG와 삼성은 국내와 세계 시장을 통틀어 TV와 가전 부문의 오랜 앙숙입니다. 1990년대 말 경제위기에 따른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이후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으로 LG반도체가 지금의 SK하이닉스로 흡수되지 않았다면 반도체 분야에서도 라이벌이 됐을지 모릅니다.
2006년 출시된 '보르도TV'는 삼성전자를 글로벌 TV 시장에서 처음으로 1위를 이끈 첨병이었다. 삼성전자 제공TV만 놓고 보면 삼성은 LG에 한 발 앞서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2006년 글로벌 TV 시장에서 1위에 올라선 이후 올해 3분기까지 16년째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2000년대 초 벽걸이용 LCD(액정표시장치) TV를 대중화하는 데 성공하며 단숨에 업계 선두로 뛰어올랐습니다. 삼성은 2009년에는 국제전자제품박람회 'CES 2009'에서 LCD TV의 일종으로 보다 선명한 화질을 구현해 낸 LED(발광다이오드) TV를 공개했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LG는 1970년대에 세계 최초로 OLED 재료를 개발한 이스트만 코닥의 OLED 사업부를 인수하는 등 반격에 나섰습니다. LG전자는 2009년 12월 38cm(15인치형) 크기의 OLED TV를 국내에 처음으로 출시했습니다. 2년 전 상용화에 성공한 소니에 이어 세계 두번째였습니다.
LG전자가 2009년 12월 국내에 첫 선을 보인 15인치 OLED TV. 출고가는 300만원에 육박했다. LG전자 제공당시 관련 소식을 전한 기사에는 LG전자 관계자가 "LCD 또는 LED TV로는 언제나 삼성의 추격자에 그칠 수밖에 없다"며 "삼성전자가 장기 점령중인 TV 시장 1등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OLED TV 시대를 조기에 열기로 했다"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기술 유출' 엎치락뒤치락…TV용 대형 OLED 시장의 승자는 결국 LG
삼성은 2009년 당시 소형 OLED 시장의 선두 주자였습니다. 그해 2분기 삼성디스플레이의 전신인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는 전 세계 OLED 시장에서 1억달러가 넘는 매출로 65%의 점유율을 차지한 압도적인 1위였습니다. 후발 주자인 LG는 삼성 매출의 1%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LG는 LCD와 LED를 잇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대형 OLED를 전략적으로 키우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LG에너지솔루션의 최고경영책임자(CEO)를 맡고 있는 LG그룹의 2인자인 권영수 부회장은 2010년 LG디스플레이 사장으로서 기자들에게 "OLED 강점을 살리려면 화면이 커야 하는 만큼 휴대폰보다는 TV용 OLED에서 승부를 걸 생각"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꿈의 디스플레이'로 불린 OLED 시장에서 삼성은 소형 패널 시장의 98%를 점유한 상황. LG전자는 2010년 9월 31인치 OLED TV를 공개하는 등 서서히 대형 패널 시장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양사는 공히 2013년 안에 55인치 대형 OLED TV를 시장에 내놓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기술 개발에 공을 들였습니다.
LG전자는 2010년 9월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인 'IFA 2010'에서 두께가 0.29cm에 불과한 31인치 OLED TV를 공개했다. LG전자 제공삼성은 빛을 내는 유기발광 입자를 패널에 붙이는 이른바 'RGB OLED' 방식을 택했습니다. 반면 LG는 발광층을 쌓아 만든 백색(W) OLED에 빛의 3원색(빨간색·초록색·파란색) 컬러필터를 탑재하는 'WOLED' 기술을 내세웠습니다.
어떤 기술이 더 우위에 있는지 여부는 기자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 밖입니다. 양사의 해묵은 디스플레이 논쟁과 감정 싸움을 일일이 소개할 필요도 없겠죠. 다만 시장의 평가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LG는 2021년 현재 전 세계에서 대형 OLED 패널을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업체입니다.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은 때로 전면전 양상으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2012년 4월 수원지검 형사4부는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의 대형 OLED 기술 유출 혐의와 관련해 사상 처음으로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안에 있는 LG디스플레이 본사를 압수수색했습니다.
삼성을 나와 경쟁사인 LG로 이직한 연구원들이 OLED 패널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결국 재판에 넘겨졌고 양사의 분쟁은 특허 소송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정부까지 나서 중재한 끝에야 양사는 각각 1건씩의 소송을 자진 취하했습니다. 협상에 물코가 트이는가 했지만 2013년 4월 삼성이 LG의 패널 기술을 빼돌린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면서 양사의 처지는 정반대가 됐습니다.
'20만9천원' 힌지 사건 등 냉장고·세탁기 두고 사사건건 충돌
삼성전자는 2012년 8월 '냉장고 용량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에서 자사의 냉장고가 경쟁사인 LG전자보다 출시 용량은 적지만 더 많은 물이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유튜브 캡처당시 LG와 삼성은 말 그대로 사사건건 충돌했습니다. 냉장고 용량을 둘러싼 100억원대 소송전이 대표적입니다. 경쟁적으로 대형 냉장고의 크기를 키우던 시절, 자사 제품이 낫다는 광고가 경쟁사 저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성이 광고로 도발을 하자 LG는 법원에 광고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
삼성전자 세탁기를 고의로 파손한 혐의로 기소된 조성진 사장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당시 상황. 유튜브 캡처2014년 9월 독일에서 열린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서는 '세탁기 파손' 진실 공방이 벌어졌습니다. 엔지니어 출신인 조성진 LG전자 사장이 삼성전자 신제품 세탁기의 문을 여닫다가 '20만9천원' 짜리 힌지가 부서진 게 발단이었습니다.
보도자료 배포, 반박 기자회견, 수사의뢰, 맞고소로 이어졌고, 검찰은 LG전자를 전격 압수수색하며 판을 키웠습니다. 결국 재판까지 넘겨진 조 사장에게 무죄가 선고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습니다.
사실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기 전 양사의 극한 대립은 이미 풀린 상태였습니다. 양사는 디스플레이와 냉장고 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호 간의 법정 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OLED 대전에서 사실상 패배한 삼성, QLED TV로 선회
백라이트 없이 스스로 빛을 내는 OLED TV에 명운을 건 LG전자는 차츰 프리미엄 TV 시장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삼성전자는 OLED 기술을 포기하고 2017년 반도체 소재(QD) 퀀텀닷을 활용한 QLED TV를 출시하며 방향을 바꿨습니다.
삼성전자가 2018년 7월 자사 QLED TV의 '번인 프리' 인증 통과 소식을 전하며 올린 비교 이미지. 삼성전자 제공OLED TV의 치명적인 약점인 번인(burn-in) 현상을 지적하는 신경전도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2016년의 '진짜 4K' 논란, 'SUHD' 표기 논란에 이어 '잔상 현상'을 둘러싼 양사의 논쟁은 향후 공정거래위원회 제소까지 이어졌습니다.
2019년에는 LG전자가 먼저 삼성 QLED 8K TV를 조준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LG전자는 '디스플레이 기술설명회'를 열고 양사 TV의 화질을 비교하는가 하면, 실제 TV를 분해해 내부 구성품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초에는 반대로 삼성전자가 QLED TV 신제품을 사면서 OLED TV를 반납하면 일정 금액을 보상해 준다는 마케팅으로 LG전자를 겨냥했습니다.
삼성전자의 QLED TV(LG는 이를 QD-LCD TV라고 부른다) 내부 구성품(왼쪽)과 LG전자의 OLED TV 내부 구성품(오른쪽) 비교. LG전자 제공OLED 대전에서 사실상 패배한 삼성전자가 QLED로 선회한 이후에도 양사는 이처럼 지치지도 않고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삼성전자는 기술적으로 OLED TV가 피할 수 없는 '잔상 현상'을 꾸준히 지적했고, LG전자는 QLED가 본질적으로 LCD 패널이라는 점을 들어 응수하는 식이었습니다.
'이재용 재구속'으로 '휴전' 맞아…OLED 동맹설은 사실상 '종전 선언'
양사의 갈등은 뜻밖의 계기로 '휴전'을 맞았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1월 18일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의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다시 구속됐습니다. '총수 부재'를 맞은 삼성은 이후 경쟁사를 자극할 수 있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했습니다. LG전자 역시 공격을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코로나19 대유행까지 겹치면서 양사는 만 2년 가까이 휴전 상태입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해 7월 충남 아산사업장에서 이동훈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들과 협력사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QD 설비 반입식'을 개최했다. 삼성디스플레이 제공이런 와중에 삼성은 최근 차세대 QD-OLED 양산에 돌입했습니다. 내년 1월에는 'CES 2022'에서 QD-OLED TV를 처음 공개할 전망입니다. QD OLED는 무기물인 퀀텀닷(양자점) 물질을 활용한 디스플레이로, 기존 OLED의 잔상 현상을 개선하고 색상도 더욱 선명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게 삼성 측의 설명입니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가 출시할 예정인 QD OLED TV 신제품에 LG디스플레이가 만든 OLED 패널이 공급될 수 있다는 분석이 잇따라 나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삼성-LG 동맹설'입니다. 차세대 OLED 시장을 둘러싼 양사의 10여년에 걸친 전투가 사실상 '종전'을 맞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 건 올해 들어서만 지난 4월과 6월에 이어 벌써 세번째입니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지난 10일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의 전략적 협력 가능성이 큰 이유는 내년 삼성디스플레이 QD OLED 패널 공급량이 연간 100만대 수준에 불과한 반면, LG디스플레이는 1100만대 수준의 WOLED 패널 생산능력 확보가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정원석 하이투자증권 연구원도 최근 보고서에서 "전 세계 1위 TV 업체인 삼성전자의 LG디스플레이 패널 채택이 확실시돼 간다"며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간의 협력 관계 구축은 두 회사 모두에 윈윈(win-win)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8.5세대 OLED 패널을 생산하는 LG디스플레이의 중국 광저우 공장. LG디스플레이 제공올해 OLED TV 시장 규모는 전년보다 80% 늘어난 650만대 수준으로 예측됩니다. LG전자는 약 60%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16년째 세계 1위인 삼성이 OLED 시장에 뛰어든다면 시장은 분명 더 커질 겁니다. 삼성이 자체 패널만으로는 연간 100만대 생산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외부에서 패널을 구입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다만 업계에서는 OLED 패널 구매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OLED 패널의 약점인 '잔상' 현상을 꾸준히 저격했던 삼성전자가 이제 와서 입장을 뒤집을 리 없다는 분석입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LG디스플레이의 OLED 패널 공급설과 관련해 사실무근이라고 밝혔습니다.
삼성은 이미 LG디스플레이로부터 TV 생산에 필요한 LCD 패널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LG디스플레이의 LCD 패널을 채택했을 때도 대외적으로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점을 들어 양사가 협력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중국이 장악한 LCD TV 시대를 뒤로 하고 한국이 주도하는 OLED TV가 차세대 프리미엄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기대입니다. 김 연구원은 "삼성전자 OLED TV는 글로벌 TV 시장 판도를 뒤흔들 태풍의 눈이 될 것"이라며 "글로벌 TV 16년 연속 1위인 삼성전자의 OLED TV 시장 신규 진입이 OLED TV 생태계 확대와 대중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