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현 기자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정기인사지만 올해 인사 뒤 법원 분위기는 유독 어수선하다. 지난 4일 있었던 법원 정기인사에서 52명의 판사가 사표를 던졌다. 퇴직 의사를 밝힌 인사들 대부분이 지방법원 부장판사 이상의 중견이었다. 지난달 있었던 고위법관 인사에서 사직한 20명까지 포함하면 70명 넘는 판사들이 법복을 벗은 셈이다.
법원 내에서는 '예견된 탈출'이라는 자조 섞인 평가가 나온다. 현행 법관 인사제도 자체에 내재된 모순점이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는 지적이다. 가장 큰 문제로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도의 폐지가 꼽힌다. 김명수 대법원이 내세운 수직적 인사구조 개선의 상징적 조치가 바로 고법 부장판사 제도 폐지였다. 능력 있는 법관들이 고법 부장 승진을 위해서 비대화된 법원행정처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이같은 제도개혁의 명분을 제공했다. 상고법원 도입 등을 놓고 박근혜 정부와 재판거래를 한 혐의로 구속 기소까지된 양승태 대법원장과의 결별을 상징하는 변화이기도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사진공동취재단하지만 능력 있는 판사들의 대명사 였던 '고법 부장판사' 제도가 사라지면서 목표의식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뜩이나 과중한 업무와 상대적으로 제한된 대가 속에서 일하던 판사들에게 승진 기회마저 박탈하면서 의욕 있게 일할 명분마저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이러다보니 판사 경력 15년 이상 판사들 사이에서 '고법 부장판사급 이상 고위법관 퇴직 뒤 3년간 로펌 취업 제한'이라는 굴레에 얽히기 전에 법원을 떠나는게 상책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올해 70명 넘는 판사들이 갑자기 옷을 벗은 것은 이런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사법농단' 파동의 양승태 대법원에 이어 김명수 대법원이 들어섰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은 '코드인사' 논란은 이런 법원의 허탈감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판사들이 중요시 하는 법원행정처 등 주요요직에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판사들이 대거 임명된 것이 그것이다. 이번 정기인사에서 법원행정처 기획총괄심의관에 임명된 신재환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와 헌법재판소로 파견된 송재윤 판사 등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다. 서울중앙지법에 새로 전보된 50명의 부장판사 중 최소 6명 이상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판사들, 특히 유능한 법관들의 대량 유출은 필연적으로 사법시스템의 과부하로 연결된다. 가뜩이나 법원은 고질적인 인력적체로 판사 1인당 맡는 사건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판사들의 피로도도 급증하고 있다. 사법시스템 과부하의 피해는 필연적으로 이를 이용하는 국민들에게로 직결된다. 유능한 판사들의 유출을 막기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