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노컷뉴스지난 5일 한 인터넷방송 진행자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2019년 이 진행자는 생방송 도중 '남성 혐오' 손동작을 취했다는 이유로 거세게 비판 받았다. 한 차례 사과에도 악성 댓글과 조롱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27세 나이에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감했다. BJ 잼미로 활동하던 고(故) 조장미씨 이야기다.
유가족에 따르면 고인은 수많은 악성 댓글과 루머 때문에 우울증을 심각하게 앓았고 그것이 사망의 원인이 됐다. 생전에 고인은 모친의 사망 역시 딸인 자신에 대한 악성 댓글 때문임을 밝히며 방송을 중단한 바 있다. 결국 온라인 폭력이 차례대로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들 모녀를 괴롭히고 조롱한 유튜버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처벌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벌써 동의 21만명을 넘었다. 그럼에도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온라인 공간은 이제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익명성에 기반한 세계이지만 '진짜 사람'의 인격과 정체성이 머물러 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온라인 공간과 삶의 교집합은 더욱 늘어났다. 온라인 폭력은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꾸기 충분하다. 그러나 정작 현실과 달리 그 규제와 처벌이 엄격하지도, 실효성 있게 이뤄지지도 않는 현실이다.
미디어 등 각계 전문가들은 지난 1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에서 열린 '방치된 혐오: 온라인 폭력 이대로 둘 것인가' 긴급 토론회에 참석해 온라인 혐오 표현을 근절하고자 머리를 맞댔다.
온라인 폭력은 주로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에서 비롯된다. 표현이 폭력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말'은 '행위'가 된다. 비속어나 욕설이 없더라도 "쟤 페미(페미니스트)래"라는 말이 단순 문장이 아니라 위협이 되는 지점이 그렇다. 일각에서는 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혐오 표현이 약자들의 목소리를 지우는 악영향을 미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 이진순 대표는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온라인 폭력은 소셜미디어와 단체채팅방에서 가장 취약한 대상, 여성,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를 사냥감으로 삼아 집단적으로 행해진다"며 "피해 추산이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고 전방위적이다. 온라인 폭력은 직접적인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들의 영혼도 파괴하고 우리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한다. 집단적 가학증의 광기는 좀비 바이러스와 같다"라고 짚었다.
발제를 맡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김민정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혐오 표현에 소수자나 피해자가 침묵하게 되면 그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어 표현의 자유 총량 역시 줄어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체 표현의 자유는 가해자의 자유가 될 수 있다. 혐오 표현 대응 방안을 '표현의 자유' 침해로 손쉽게 규정하거나 플랫폼 자율 규제를 '사적 검열'로만 이해하는 방식, '규제'와 '자유'를 이항 대립 구도로만 이해하는 방식 등에서 탈피하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촘촘히 쌓인 '혐오의 피라미드'는 서서히 정상적인 사회 시스템을 붕괴 시켜 집단 학살까지 이어진다. 1930년대부터 독일 전역에 뿌려진 유대인 혐오의 씨앗이 결국 나치의 잔혹한 유대인 학살을 낳은 것처럼, 온라인 스토킹이 다른 강력 범죄로 발전하는 경우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김 교수는 "혐오 표현은 신뢰와 사회의 공공선을 저하 시키고 종국에는 민주주의 작동에 악영향을 준다"며 "민주주의는 결국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고 타협하면서 사회의 공동선을 찾아가는 과정인데 동료 시민을 혐오의 대상, 무시와 차별을 받아 마땅한 존재, 배제·척결의 대상으로 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지적했다.
혐오=스포츠 된 한국 사회…제동 걸 방법 없나
그래픽=안나경 기자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왜 약자를 겨냥한 집단적 온라인 혐오가 기승을 부리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경제 위기, 불평등 심화, 코로나19 상황의 장기화, 청년 실업, 신자유주의 등 사회 구조적 문제로 누적된 불만과 절망이 혐오 표현과 온라인 폭력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고 봤다.
문제는 혐오 표현이 일부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10대 이하 세대는 온라인 공간의 혐오 표현을 그대로 학습하고 사회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약자에 대한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만연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이를 바로잡아야 할 시스템인 정치권과 언론, 관련 플랫폼들까지 혐오 정서에 적극적으로 편승하거나 방치하고 있다. 정권에 중대한 표심이나 광고 등 수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를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 명명하면서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하기 시작한다. 한국 사회는 혐오 표현에 허용과 승인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부재하고, 정치인들은 혐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그 정서에 편승한다. 언론은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혐오 보도를 일삼고, 인터넷서비스사업자들의 조치는 소극적이다. 이것들이 맞물리면서 혐오의 언어는 늘어난다"고 분석했다.
사이트 차단 등 무조건 강력한 규제만이 능사는 아니다. 업계와 정부 그리고 이용자와 법 집행기구까지 모두 참여하는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 공동 규제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업계는 △자체기준 제정 및 운용에 있어 적법성·필요성과 비례성 기준 충족 △구제 장치 마련 △기준 제정 및 집행에 이용자 참여 보장 △기술개발 △인력 및 재정 지원 △게시물 삭제 이외의 다양한 혐오 표현 대응 노력 등에 참여해야 한다.
무엇보다 플랫폼 사업자는 온라인 폭력과 혐오 표현에 대해 기업 이익에 우선한 조치를 멈추고, 사회적 책무성을 강화하는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말뿐인 규제가 아니라 실질적 자율 규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양대학교 유승현 언론정보대학원 특임교수 겸 민언련 정책위원은 △플랫폼 사업자의 민사상 불법 행위 책임 규정 △기존 자율 규제 제도 또는 가이드라인 강화와 준수 △정보 필터링을 통한 고품질 콘텐츠 제공 및 콘텐츠 분류 기준 공개 △온라인 폭력·혐오 표현 등의 유해 게시물에 대한 적극적인 삭제 조치 및 대응 △온라인 폭력·혐오 표현 등의 유해 게시물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이익 중단(보상 정책 및 광고 중단) 정책 마련과 절차 시행 △유해 게시물에 대한 알고리즘 개선 및 투명성 확보 실천 △이용자·사업자·정부 등 이해관계자의 상생적 협의체계 구축 등을 주문했다.
정부는 자율규제 활성화를 위해 업계 기준 마련 촉진 및 다수 사업자 참여 독려, 자율규제 집행에 대한 관리 감독 등에 나서야 한다. 이에 따라 법 집행기구가 불법 정보에 명확히 대응하려면 △차별·적의·폭력 선동 혐오 표현에 대한 입법이 선행되고 △역외규제 노력 △망법상 임시조치제도 보완 등이 요구된다.
국회 최진응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플랫폼 책임과 관련해 온라인 폭력 정보로부터 이용자 안전을 보장하고 관리 책임을 위한 탐지와 신고 등 절차 및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절차 및 규정을 플랫폼이 마련하도록 입법 근거 또한 있어야 한다. 유튜브 등 대형 플랫폼 위주로 관리 책임을 두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이들 사업자는 경제적 수익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이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를 포함한 이용자들은 △불법 정보 및 업계 정책 기준 위반 게시물에 대한 신고(신뢰 받는 신고자 역할 포함) △규제 집행 방식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 제기 및 사업자와의 협력 △교육·캠페인·대항 표현 등 혐오 표현 대응 노력 등에 힘써야 한다.
여성현실연구소 권김현영 소장은 "사실상 온라인 폭력에 대한 규제 공론 기능은 20년 동안 실패했다. 이를 넘어선 변화가 필요하다"며 "사업자 책임을 강화하는 자율 규제와 법적 제재 그리고 상호 존중하는 디지털 시민성을 촉진하는 세 가지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온라인 폭력을 전담해 다루는 독립 기구가 인터넷 접근금지 명령이나 보호관찰제도를 도입하고 즉각 게시물 삭제를 통해 폭력에 노출되는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 또 규제를 만들고 시행하는 주체는 온라인 문화를 이해하는 구성원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함께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