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개봉한 영화 '브로커'에서 소영 역을 연기한 이지은. 이담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일러 주의
열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데뷔한 아이유는 비교적 금세 대중의 주목을 받은 케이스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그것도 꽤 잘하는 앳된 외모의 소녀 가수. '부'(Boo) '마쉬멜로우'로 반응이 왔고 '잔소리' '그대네요' 등 듀엣곡 히트에 이어 3단 고음을 뽐내는 '좋은 날'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 후 아이유는 내는 모든 노래를 대표곡이자 인기곡으로 만드는 가수이자 직접 작사·작곡하는 작가이면서, 앨범 제작을 총괄하는 프로듀서로 자리매김했다. 평단과 대중 모두가 반기는 '가수 아이유'의 현재다.
데뷔 3년 만인 2011년부터 드라마 '드림하이 1'로 연기에 도전했다. 잠깐의 외출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으나 '최고다 이순신' '예쁜남자' '프로듀사'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나의 아저씨' '호텔 델루나' 등 주말드라마부터 미니시리즈, 사극까지 다채로운 장르와 역할을 맡으며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네 명의 감독이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낸 단편을 묶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시리즈 '페르소나'를 시작으로 '아무도 없는 곳'과 '드림'을 찍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브로커'는 '배우 이지은'의 첫 상업영화다.
'어느 가족'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은 고레에다 감독은 첫 한국 영화 연출작 '브로커'로 통산 8번 칸에 진출하게 됐다. 베이비 박스를 둘러싸고 관계를 맺게 된 이들의 예기치 못한 특별한 여정을 그린 '브로커'에서 베이비 박스에 아기를 두고 간 엄마 소영 역을 연기한 이지은은 처음으로 칸 레드카펫을 밟았다. CD를 들고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이 몰렸을 만큼 현지에서 열렬한 인기를 과시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열린 '브로커' 소영 역 이지은의 라운드 인터뷰에서도 칸영화제 후일담 관련 질문이 자주 나왔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그가 연기라는 영역에서도 '칸 진출'이라는 기록을 추가하는 것을 흥미롭게, 혹은 응원하며 보는 이들이 존재한다. 전 국민이 10대 후반부터 20대를 지켜본 아이유의 '30대'에 관심이 쏠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남보다 더 긴 20대를 보낸 것 같다는 이지은 역시 본인의 30대를 '기대하는 중'이다.
더 깊은 이해를 도왔던 고레에다 감독의 손 편지
고레에다 감독의 시나리오는 간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신 그는 손 편지를 썼다. 자신이 설계한 캐릭터의 전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전달했다. 소영 역 이지은에게는 소영이 구속당했을 때 한 인터뷰를 토대로 한 전사를 편지글 형태로 주었다. 대본에는 없던 설정도 포함됐다. 이지은은 "저도 질문을 많이 해서 귀찮게 하긴 했다. 왜 이렇게 했는지, 이러고 나서 소영이가 후회는 없었는지, 어떤 생각으로 이 선택을 한 것인지… 그때마다 굉장히 성심성의껏, '애매하지 않은' 대답을 주셨다"라고 말했다.
이런 작업 방식이 잘 맞았는지 묻자, 대번에 "저는 좋았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디렉팅이 많은 감독, 거의 터치하지 않는 감독 모두를 만나봤다는 그는 둘 다 장단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레에다 감독님 현장은 디렉팅이 정말 많지 않았고 배우가 해석하는 부분을 많이 열어주셔서 자율성을 주셨다. 제가 후반부에 긴장이 풀리고 나서 어떤 아이디어로 한 테이크 가 보고 싶다고 했을 때 항상 너무 좋은 것 같다, 한번 해 보죠 해 주셨다. 배우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는 작업방식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왼쪽부터 해진 역 임승수, 동수 역 강동원, 소영 역 이지은, 우성 역 박지용, 상현 역 송강호. CJ ENM 제공이지은이 가장 좋았다고 꼽은 '관람차 신'에서 고레에다 감독과 이지은이 택한 테이크는 일치했다. 촬영 상황이 더 좋지 않았는데도 영화에는 첫 테이크가 쓰였다. 리얼리티를 살리는 데 주력하는 방식이 초반에는 어려웠고, 본인 상상과도 달랐지만 차츰 적응해나갔다. 이지은은 "'이번 테이크는 아예 다르게 갈 수 있을까요' 제안을 종종 하셨는데, 초반에는 '오, 이건 준비 안 했는데' 솔직히 이런 마음이었다가 나중에는 '더 좋은 게 걸릴 수도 있는 기회겠다' 싶었다. 여러 기회를 주셔서 좋았다"라고 말했다.
'브로커' 현장은 '아기'와 '어린이' 배우들이 적지 않았다. 이지은은 "아이, 동물과 영화 찍는 게 힘들다고 선배님들이 그러시던데, 이 아이들에게 전혀 부담이나 힘듦을 주지 않으려고 (감독님이) 너무 노력하고 애쓰시는 게 보이더라. 나중에는 그런 부분에 인간적으로 감동하기도 했고, '이렇게 해 오셔서 저렇게 되신 거구나' 생각도 했다"라고 밝혔다.
영화 현장 경험이 적었고, 상업영화는 '브로커'가 처음이었던 데다,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등 베테랑 배우들과 함께하는 자리였기에 이지은은 촬영 초반부 늘 긴장 상태였다고 한다. 좋은 현장 분위기에 젖어서 '연기'라는 자신의 할 일을 제대로 못 할까 봐, 제작진이나 배우들과 이야기도 거의 나누지 않았다고.
이지은은 "막상 작품이 끝나고 나니까 (현장에서) 말씀드리지 못했던 게 아쉽더라. 언제 또 뵐 수 있을지 모르는데… 감독님과 작업한 게 얼마나 영광이었는지, 진짜로 팬이고… 감독님께도 제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지만, 감독님도 '태어나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했다"라며 포털 번역기 도움을 받아 일본어로 답장을 했다고 설명했다.
생애 첫 칸 입성…가장 기억에 남는 평
이지은은 상업영화 데뷔작 '브로커'로 처음으로 칸 레드카펫을 밟았다. CJ ENM 제공'칸이 사랑하는 감독'이라고 불리는 고레에다 감독은 이번 '브로커'까지 총 8편의 연출작이 초청받은 바 있다. 이지은은 상업영화 데뷔작으로 칸 레드카펫을 밟게 됐다. 빠듯하고 정신없는 일정이라 시차 적응도 못 했지만, 즐거운 기억이 많았다.
드레스와 수트 등 패션도 모두 좋은 반응을 얻었고, 특히 송강호가 이지은의 드레스를 두 번이나 밟은 것이 목격돼 온라인에서 유머로 소비되기도 했다. 이지은은 "사실 저는 (드레스 밟힌 걸) 알았다. 드레스 입으면 모를 수가 없다"라며 웃었다. 이어 "팽팽할 정도로 밟지는 않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라며 "죽기 전에 레드카펫에 설 수 있다면 꼭 짧은 드레스를 입어야지 했다"라고 부연했다.
이지은은 칸 현지에서 단연 열렬한 환영을 받은 주인공이기도 했다. 팬들은 앨범 CD를 들고 오거나 한국어로 응원의 메시지를 건넸다. 이지은은 "이 사람들이 다 우리 팀을 보러왔다는 것 자체가 안 믿기는데 심지어 제 CD 든 분들이 많아서 진짜 몰래카메라 같단 생각을 많이 했고 레드카펫 할 때도 너무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먼 곳에 유애나(팬덤명)가 있다니! 심지어 내 앨범을 사 가지고… 어떻게 샀을까, 직구했을까? 그런 생각이 순간 들었다. 내 편들이 많구나 싶어 힘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브로커'는 칸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됐다. 어디에 내가 나오는데, 나 어떻게 연기했지 등 본인을 보느라 급급했다면서도 이지은은 "영화가 훨씬 웃기고 울리고 그러더라. 그래서 저는 나오자마자 가족 단톡방에 엄마 아빠가 봐도 재미있어 할 것 같다고 남겼다"라고 설명했다. 웃었던, 울었던 지점은 어디일까. 그는 금세 "저는 송강호 선배님 얘기하시는 건 다 웃기더라. '어, 저거 웃긴 신이었나?' 했다"라며 "관객들이 어떨지는 잘 몰랐는데 많이 웃고 울던 기억이 난다"라고 덧붙였다.
프랑스 칸 포토콜 당시 이지은의 모습. CJ ENM 제공출연작 7편이 칸에 초청됐고, '브로커'로 한국 남자배우 중 처음으로 칸 연기상을 받은 송강호와 작업한 소감은 어떨까. 이지은은 "촬영하기 직전까지는, 송강호 선배님과 하는 신이 가장 떨린다. 모든 신 중 가장 떨리는데 촬영 딱 들어가면 가장 안 떨린다. 매 순간 놀란다. 그건 선배님의 힘일 거다. 급기야 상대배우까지 몰입하게 해 주시는 힘. 컷 하면 물론 떨리는데 연기할 땐 너무 상현(역할명)이 되어 계시니 그게 저도 신기했다"라고 돌아봤다.
'브로커'는 공개 직후 관객들로부터 12분 동안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지은은 "모든 게 다 처음이긴 했지만 너무 뻘쭘하기도 하고 사실상 감독님과 송강호 선배님 제외하고는 모두 민망해서 '이거 누가 끝내는 거야?' 하면서 복화술을 했다. 카메라가 비출 때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그걸 준비하라고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엄청 길게 찍으시더라. 그게 다 담겨서 민망했다"라며 웃었다.
외신 반응은 갈렸으나, 호평도 상당했다. "이지은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이지은의 얼굴을 많이 활용한 것 같다." 이지은이 가장 인상 깊게 본 평이다. 그는 "저는 저라서 잘 인지하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리액션 컷도 제 거를 많이 쓰신 것 같더라. 어떤 컷에 어떤 얼굴이 들어가는지 배우들은 잘 모른다. 저를 믿어주셨던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라고 전했다.
'열심히 하는 게 맞나' 의심했던 20대, 지금은 조금 너그러워져
열여섯 살에 데뷔한 이지은은 올해 30대에 들어섰다. 부인할 수 없는 '빛나는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지는 시간이었다. 힘들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지은은 "몸은 힘들고 땀은 나고 바쁜데 이걸 열심이라고 하는 게 맞나? 뭘 해야지 열심이라는 기분이 들까. 그게 항상 만족이 안 됐다"라고 털어놨다.
"20대라는 한 챕터가 끝나면서 작년 올해를 조금씩 되돌아봤을 때 뭘 치열하게 많이 남겼더라고요. '내가 지금 이건 이래 저건 저래' 쓰잘데기없는 것도 곡으로, 낙서로, 작품으로… 뭐가 됐든지 간에 몸부림친 그게 이제는 봐지더라고요. 그때 당시에 할 수 있는 한 제일 치열하게 살았고 전력 다했으면 되돌아간다고 해도 저 이상 열심히 살 수 있을까 싶어요. 기준이 낮아진 건지, 스스로에 대해서 이해와 관용이 커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좀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 이지은. 이담엔터테인먼트 제공
어떤 30대를 기대하냐는 질문에 이지은은 "10대라고 해서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건 크게 없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20대가 4년 정도는 더 있었다고 체감한다. 올해 딱 30이 된 건데 '에이, 안 믿어' 하면서도 내심 기대하던 게 있다. 내가 30살이 되면 좀 마음이 편안해질까 하는 것"이라며 "화려하고 대단한 일이 빵빵 벌어지지 않아도 내가 내 생활에 만족감을 갖는 날이 지속되면 좋겠다"라고 바랐다. 비록 30대가 된 지 반년밖에 되진 않았지만, "전력으로 막 애쓰고 있다는 느낌은 잘 안 들"어서 "그냥 좋다"고.
30대가 된 싱어송라이터 아이유가 들려줄 음악을 궁금해하는 이들을 위해 귀띔해달라고 요청하자, 이지은은 "사실 뭘 쓰고 있긴 하다"라며 웃어 보였다. 뚜렷한 결과물로 구체화할 생각이 없어서 뭘 쓰고 있다고 하기 민망하다는 그는 아직 '20대 때 했던 방식'으로 작업 중이라면서도 "30대 첫 작품이니까 음악 활동을 한다면 20대와 달랐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자꾸 이건 탈락, 저건 탈락시켜버려요. '이건 재밌는 부분은 있지만 20대 때 많이 했던 거잖아' 이런 식으로. 언제 나올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20대 때와는 좀 다른 시각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래봤자 제 안에서 나오는 거니까 얼마나 다르겠냐마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