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SPC 본사 앞에서 열린 '제빵공장 청년노동자 사망사건 해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청년단체 회원들이 사고를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지난 15일 경기 평택시 SPC 계열 SPL 제빵공장에서 20대 청년 근로자가 작업 중 사고를 당해 숨졌다. 연합뉴스국내 제빵업계 1인자인 SPC그룹 계열사의 평택 공장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노동자 사망사고는 회사 측과 관계 당국의 관리·감독 부실로 빚어진 '예견된 인재'라는 사회적 비난이 거세다.
사고 시점 '나 홀로', 보호 장치도 '無'
18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숨진 A(23)씨는 15㎏ 안팎의 소스통을 혼자 들어 붓다가 몸이 한쪽으로 기울면서 기계에 빨려 들어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가 난 교반기는 가로·세로 약 1m, 높이 1.5m가량 되는 오각형 모양의 통이 달린 기계다. 안전하게 뚜껑을 덮어야 작동하는 스팀 교반기나 밀가루 반죽 배합기보다는 작은 크기다.
17일 SPL 평택공장에서 한 직원이 이틀 전 20대 근무자 사망사고 발생한 사고 기계 옆 같은 기종의 소스 교반기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A씨는 이 기계 앞에서 동료인 B씨와 함께 교반기에 재료를 부어 소스를 섞은 뒤 용기에 담아 운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경찰의 외부 폐쇄회로(CC)TV 확인 결과, 당시 B씨는 다른 위치에 있던 재료들을 교반기로 옮기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경찰은 평범한 성인여성 키인 A씨가 기계 안으로 상반신이 들어가게 된 구체적 경위를 비롯해, 고용노동부와 함께 해당 사업장의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 등을 집중 조사 중이다.
인간성 상실한 노동현장…안전 시스템은 '뒷전'
이번 비극에 대해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는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 설치와 근무체계만 지켜졌어도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안전교육과 현장 관리 등 산업재해 예방과 관련한 경영 부실 문제에 대한 일침도 뒤따른다.
평택 제빵공장에 차려진 분향소를 찾은 동료들은 "안전펜스만 있었어도 통 속에 빨려 들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한결같이 안타까워했다.
별도의 안전장치가 없는 교반기에 대해 그동안 공장 직원들은 사고 위험이 높다며 펜스 설치 등을 요구해왔지만 사측으로부터 묵살된 것으로 전해졌다.
연합뉴스실제 이 공장은 끼임 방지 장치를 설치하지 않고도 산업안전공단으로부터 안전보건경영시스템(KOSHA-MS) 인증을 받아 온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SPC그룹 계열 SPL 평택공장은 2016년 최초로 안전경영사업장 인증을 받은 뒤 2019년과 올해 5월 두 차례 연장까지 받았다.
2인 1조 체제도 유명무실했다. 2명 중 1명은 수시로 이동을 하느라 같은 공간에서 상대방 안전을 챙길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사 동료인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강규혁 SPL 지회장은 이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잦은 이동 등으로 변수가 많기 때문에 3인 1조가 돼야 상시 2인 작업이 가능하다"라며 "옆에서 누가 정지 버튼만 눌러줬어도 사망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라고 지적했다.
이어 "회사가 우리를 감정도 없는 기계로 본 것 같다"며 "조금만 (안전을) 신경 써줬더라면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인데, 생산과 이익만을 너무 강요한다"고 토로했다.
분기별 6시간으로 규정된 안전교육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화섬식품노조가 사측이 직원을 대상으로 안전교육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고, 한 달 단위로 교육을 이수했다는 서명만 받는 방식으로 서류를 날조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17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SPC 계열 SPL 제빵공장에서 지난 15일 소스 교반기계에 끼여 숨진 20대 근로자 사망사고 관련 엄정수사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전날 화섬식품노조는 평택지역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파리바게뜨공동행동'과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7일에도 유사 사고가 발생했는데 관리자들은 계약직 직원이 다치자 30여분 세워놓고 사고의 잘잘못을 따지면서 방치한 뒤 의무실로 옮겼다"며 "우리는 안전교육도 받지 못한 채 안전하지 못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노조는 중대재해에 대해 철저한 원인 조사와 경영자 책임을 촉구하며, 사측에 '산업재해 안전대책 요구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대책 없어도 '형식적' 인증, 안일한 관리·감독
이처럼 안전체계가 미흡한데도 공공기관의 인증이 무분별하게 이뤄졌다는 점도 문제다.
이 의원이 입수한 안전공단 자료에 따르면, SPL 평택공장은 업무상 재해 중 40.5%가 끼임 사고였지만 끼임 사고 방지 장치(인터록) 설치 여부를 심사받지 않고 안전 인증을 받았다. 이 공장에서는 지난 2017년부터 올해 9월까지 모두 37명의 사고 재해자가 발생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많은 15명이 끼임 사고를 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사고가 반죽 기계에서 발생한 점을 감안해, 산업안전보건법 하위법령인 산업안전보건 규칙을 위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규칙은 "사업주는 근로자가 분쇄기 등의 개구부로부터 가동 부분에 접촉함으로써 위해를 입을 우려가 있는 경우 덮개 등을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SPC 본사 앞에서 열린 '제빵공장 청년노동자 사망사건 해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청년단체 회원들이 SPC 로고에 사고 해결을 위한 요구안을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SPL 평택공장은 2020년 정부의 '대한민국 일자리 으뜸기업'으로도 선정돼 최근 3년간 고용노동부의 정기근로감독도 면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자리 으뜸기업은 양질의 일자리 창출 분위기 조성을 위해 2010년 도입된 제도로, 선정 기업에 금리 우대, 세무조사 유예, 정기 근로감독 면제 등의 행정·재정적 지원을 제공한다.
하지만 잇단 안전사고는 물론 사망 산재까지 발생하면서, 근로감독 면제 혜택이 오히려 산재 사고를 부추기는 역설적인 상황이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사측은 사고 직후 선혈이 남은 상태에서 나머지 공장기계를 가동해 여론에 뭇매를 맞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국노총은 전날 비판성명을 내고 "노동부가 방호장치 없는 혼합기에만 작업중지 명령을 내려 죽은 노동자의 선혈이 그대로 남은 곳에서 동료들이 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뒤늦게 나머지 2대 혼합기에 대한 작업 중지를 명령하고 사고가 발생한 3층 전체의 공정 중지도 권고했다"면서 노동부의 부실한 조처를 비판했다.
17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SPC 계열 SPL 제빵공장에서 지난 15일 소스 교반기계에 끼여 숨진 20대 근로자 A씨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앞서 지난 15일 오전 6시 20분쯤 SPC그룹 계열사인 SPL 평택공장에서 A씨가 소스 교반기계에 몸이 껴 숨졌다. A씨는 입사 2년 반밖에 되지 않은 사회 초년생이었다.
SPC는 허영인 회장 명의로 발표한 사과문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와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