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아파트 모습. 황진환 기자서울 내 인기 지역의 한 대단지 아파트 전용 60㎡를 보유하고 있는 A씨는 최근 잠을 설치고 있다. 2년 전 보증금 9억원에 전세계약을 했던 임차인이 최근 '만기가 끝나면 이사를 가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현재 해당 단지의 전세시세는 6억원대로 뚝 떨어진 상황인데 새로운 임차인을 구한다고 해도 현재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모두 돌려주기에는 역부족이다. A씨는 추가대출을 받아서 보증금을 돌려주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
급격한 금리 인상 등의 영향으로 주택 매매시장이 꽁꽁 얼어붙은데 이어 전세시장까지 '된서리'를 맞았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전세대출 금리도 오르면서 세입자들이 전세보다 월세를 선호하고 있는 가운데 거래절벽이 이어지면서 매매매물을 전세매물로 돌리는 집주인들까지 더해져 전세매물이 하루가 다르게 쌓이고 있다.
18일 부동산 빅데이터 업체 아실에 따르면 전국 아파트 전세 매물은 18만5864건으로 1년 전(9만1848건)보다 두 배(102.3%) 이상 늘었다. 서울은 1년 전(2만5731건)보다 73.4% 늘어난 4만4629건으로 집계됐다. 인천(163.2%)과 경기(137.4%)는 증가폭이 훨씬 컸다.
매물이 쌓이면서 전세거래 심리도 위축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최근(10일 기준) 전국 아파트 전세수급지수는 86.7로 집계됐다. 이는 3년 전인 2019년 10월 14일(86.8)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전세수급지수는 조사시점의 상대적인 조사이지만 100을 기준으로 0에 가까울 수록 전세매물이 많은 '공급우위', 200에 가까우면 그 반대인 '수요우위'를 의미한다. 전세시장은 지난해 12월 13일(100.3) 이후로는 줄곧 공급이 수요를 웃도는 상황이다.
'급전세'도 늘었다. 일부 집주인들은 입주 청소와 이사 비용 지원, 인테리어 등 다양한 조건을 내걸며 '세입자 모시기'에 나선 상태다. 지난 5일 충남 천안의 한 대단지 아파트 전용 84㎡ 집주인은 전세 계약시 샤넬 가방을 증정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해당 면적은 최근 지난해(4억5천만원)보다 1억원 이상 낮은 보증금(3억4천만원)에 전세계약이 이뤄졌다.
전세가격도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 강북권 인기단지 중 하나인 마포구 마포구 아현동 마포래미안푸르지오 전용 84㎡는 이달 5일 7억7500만원에 전세계약이 체결됐다. 2년 전에는 10억원에도 전세 계약이 이뤄졌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전용 76㎡도 2년 전에는 9억원에도 전세 계약이 체결됐지만 현재 6억3천만원짜리 전세 물건이 나와있다.
전셋값 하락 지속…역전세난 심화. 연합뉴스
전세값이 급락하면서 '역전세' 우려도 현실화되고 있다. 역전세는 전세보증금이 직전 계약 가격보다 떨어져서 집주인이 하락한 보증금 차액만큼 세입자에게 돌려주는 상황을 의미한다.
최근 시장에서는 역전세를 넘어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월세를 내는 이른바 '역월세' 분위기도 감지된다.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만큼 목돈이 없는 집주인들이 세입자들에게 전세 대출 이자 일부를 대신 내줄테니 보증금을 시세보다 높은 수준으로 계약하는 것이다.
서울 마포구의 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전세보증금은 일종의 채무인데 전세만기가 되었는데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돈을 돌려주지 못하는 것은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집주인이 돌려줄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집주인이 '제가 월세를 드릴테니 제발 계속 살아주세요'라고 말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소한 내년 초까지는 금리 인상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보여 집주인들의 세입자 모시기 분위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 강남구의 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2년 전 새 임대차법 시행 이후 갱신청구권을 사용하지 못한 신규계약을 중심으로 전세값이 크게 올랐다"며 "전세 계약 만기가 돌아오는 올해 말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역월세가 보편화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