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빼미' 스틸컷. NEW 제공※ 스포일러 주의
'밤에만 볼 수 있는 맹인 침술사'라는 소재를 물리적인 제한으로 가져와 스릴러의 긴장감을 높인 영화 '올빼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밤'이 가진 비유적인 의미를 따와 인물의 내면을 따라 또 다른 긴장을 자아낸다. 어둑한 곳에서만이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 안에서 상상력을 덧입고 흥미롭게 펼쳐진다.
맹인이지만 뛰어난 침술 실력을 지닌 경수(류준열)는 어의 이형익(최무성)에게 그 재주를 인정받아 궁으로 들어간다. 그 무렵 청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김성철)가 8년 만에 귀국하고, 인조(유해진)는 아들을 향한 반가움도 잠시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러던 어느 밤, 어둠 속에서는 희미하게 볼 수 있는 경수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진실을 알리려는 찰나 더 큰 비밀과 음모가 드러나며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다. 아들의 죽음 후 인조의 불안감은 광기로 변하여 폭주하기 시작하고, 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경수로 인해 관련된 인물들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영화 '올빼미' 스틸컷. NEW 제공'인조실록'(1645년 6월 27일)에는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곁에 있는 사람도 분변(分辨)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영화 '올빼미'(감독 안태진)는 소현세자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덧대어 만든 스릴러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사실과 사실 사이 빈 곳을 메울 때 필요한 건 상상력이다. 여기에는 무엇에 초점을 맞춰 어떤 것을 보여줄 것인가를 설득력 있게 관객에게 보여줘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지 역시 중요하다. '올빼미'는 죽음을 둘러싼 인물들의 각기 다른 '어둠'을 스릴러로 보여주길 선택했다.
두 번의 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세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는 등 어둠이 드리운 조선, 그중에서도 어둠이 내린 궁궐에서 어둠에 갇힌 사람들과 암투 사이로 카메라가 들어간다. 영화는 '어둠'을 그리기 위해 '주맹증'(밝은 곳에서의 시력이 어두운 곳에서보다 떨어지는 증상)을 가진 경수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영화 '올빼미' 스틸컷. NEW 제공소현세자가 인질로 지내는 동안 청나라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지면서 당시 조선은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격이 되었다고 한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두 호란을 거치며 삼전도의 굴욕까지 겪은 인조는 트라우마를 겪는다. 그리고 실패한 왕으로서의 치욕과 불안과 트라우마로 가득한 내면은 신체의 병으로도 나타난다. 소현세자 역시 청에서 볼모로 지내면서 했던 속앓이는 고스란히 병세로 드러난다.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오며 인조의 트라우마를 건들게 되고,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어두운 욕망까지 더해지며 인조는 아들이지만 정치적 라이벌이자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소현세자 독살을 주도한다. 이 과정에서 안팎으로 병을 앓는 이들 사이로 주맹증 침술사 경수가 들어온다.
인조와 소현세자, 그리고 독살을 연결할 수 있는 인물로서 경수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듦과 동시에 어둠에서 볼 수 있는 자와 볼 수 없는 등을 대비시키면서 인물의 심리와 갈등, 스릴러로서의 긴장 등을 영화적으로 끌어낸다.
영화 '올빼미' 스틸컷. NEW 제공어두운 욕망, 어둠에 빠진 채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들이 볼 수 없는 앞과 '옳음'이라는 빛을 바라보는 건 경수밖에 없다. 또한 어둠이 내린 곳에 깔려 있는 욕망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경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수는 새까만 트라우마와 욕망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눈 뜬 '올빼미'다.
영화 속 경수는 스스로가 미천한 자라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지배층이자 하위계층으로서 경수가 살아남기 위해 그러한 길을 택한 것과 달리 구중궁궐 속 권력자들, 심지어 권력의 정점에 놓인 왕 인조는 그들의 욕망을 위해 존엄을 버리고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한다.
이처럼 경수라는 인물은 극의 긴장을 더하는 동시에 인조와 이형익(최무성), 최대감(조성하), 소용 조씨(안은진) 등과 대비되는 존재이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역할은 선명하게 두드러진다. 주인공인지라 많은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그로 인해 쉽게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 물리적인 의미와 반대되는 어둠과 빛의 대비 등을 드러내야 하는 인물이기에 경수에게 무게가 쏠리게 된다.
경수 캐릭터가 재밌는 지점 중 하나는 동양에서 올빼미는 불길한 징조의 상징이다. 올빼미가 울면 그 집의 주인이 죽는다는 문헌과 설화 속 이야기처럼, 경수는 인조의 마지막 길을 인도한다. 기록 밖 올빼미는 홀로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어둠의 몰락을 지켜봤다. 재앙을 불러온 건 경수가 아닌 인조를 비롯한 인물들 내면의 어둠이다. 이처럼 '올빼미'는 '어둠'과 '보지 못한다'는 소재를 역사와 인물 사이 빈틈에 착실하게 채우며 스릴러와 드라마를 완성했다.
영화 '올빼미' 스틸컷. NEW 제공
여기에 유해진, 류준열, 최무성, 조성하, 김성철 등의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스크린을 수놓는다. 어둠 안에 감춰뒀던 내면의 진득한 욕망과 공포가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들을 생생하게 담아내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든다. 유해진은 처음 맡는 왕 역할에서 인조의 트라우마와 그림자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와 함께 짧지만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는 소현세자 역의 김성철의 연기는 영화 안에서도 특히 돋보인다.
천만 영화 '왕의 남자' 조감독 출신으로 이번 영화를 통해 장편 상업영화에 데뷔한 안태진 감독은 역사적 사실과 그 사이를 메운 상상력을 현대적인 색채로 재구성해 흥미롭게 그려냈다. 본격적인 첫걸음을 단단하게 내디딘 감독이 다음으로 향할 곳이 궁금해진다.
118분 상영, 11월 23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 '올빼미' 포스터. NEW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