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웅' 윤제균 감독. CJ ENM 제공※ 스포일러 주의
영화 '해운대' '국제시장'으로 국내 최초 쌍천만 흥행 신화를 쓴 윤제균 감독이 무려 8년 만에 연출작을 들고 관객들과 만난다. 다양한 장르, 다양한 이야기로 관객들에게 웃음과 눈물을 선사했던 그가 선택한 건 국내에서는 여전히 낯선 장르로 남아 있는 '뮤지컬 영화'다.
지난 2009년 초연 이래 지금까지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국내 창작 뮤지컬 '영웅'을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다. 윤 감독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뮤지컬로 그려내는 작업에 도전했고, 그 결과물이 드디어 관객과의 만남을 시작했다.
개봉일인 21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윤 감독은 '영웅' 개봉을 자식의 결혼식에 비유하며 "어제까진 떨렸는데, 지금은 겸허한 마음으로 덤덤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를 이끈 건 '사명감'이라고 했다.
사명감으로 완성한 뮤지컬 영화 '영웅'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제균 감독이 뮤지컬 영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다른 질문에 앞서 이에 관한 답을 먼저 전하고자 한다.
뮤지컬 '영웅'과 영화 '영웅' 포스터. 파워엔터테인먼트·CJ ENM 제공 뮤지컬 '영웅'을 스크린으로…이에 뒤따른 '사명감'이란
▷ 2014년 '국제시장' 이후 스크린 연출 복귀작으로 뮤지컬 '영웅'의 영화화를 선택했다. 2012년 '댄싱퀸' 제작 당시 정성화씨가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그때 뮤지컬 '영웅'을 공연하고 있었다. 보러 오라고 해서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뮤지컬이라는 것만 알고 갔는데, 가서 오열했다. 그때 뮤지컬을 영화화해야겠다고 속으로 결심했다. ▷ 한국은 뮤지컬 영화의 불모지와 같다. 뮤지컬 영화를 연출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걱정도 많이 했을 거 같다. 제일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왜 하필이면"이었다. 다양한 장르가 있는데 하필이면 우리나라에서 성공 사례도 없고 위험도 높은 뮤지컬 장르냐는 거였다. 사실 감독 입장에서는 장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작품에 필이 꽂히면 어쩔 수 없기에 운명처럼 하게 됐다. 물론 나 역시 처음 도전하는 장르다 보니 정말 잘하고 싶은데 잘할 수 있을지 고민이 컸다. 그리고 그에 앞서 이미 결정한 이상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영화 '영웅' 스틸컷. CJ ENM 제공 ▷ 어떤 사명감이었나? 두 가지다. 우선 뮤지컬 영화로써 웰메이드(잘 만들어져서 완성도가 높은 작품)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안중근 의사를 다루는 이야기이니 철저한 고증을 통해 안 의사의 삶에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사명감. 이런 사명감이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보다 더 컸었다. ▷ 사명감으로 시작한 연출 과정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웠던 지점은 무엇이었나? 첫 번째는 뮤지컬 공연을 보신 분들을 이 영화를 봤을 때 절대 실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명확한 목표였다. 공연을 보신 분들은 평가 기준이 엄격하다. 좋은 원작을 영화가 훼손시켰다면 이에 대한 엄청난 비난이 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두 번째는 전 세계 시장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목표였다. 그 사명감을 지키기 위해 현장 라이브로 가겠다고 결심했고, 그때부터 모든 고통이 시작됐다.(웃음)
그리고 안중근 의사를 다뤄야 하니 얼마나 조심스럽겠나. 진짜 고증에 충실해야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는 물론 그 시대와 다른 위인에 대해서도 진짜 공부를 많이 했다.영화 '영웅' 프로덕션 스틸컷. CJ ENM 제공 ▷ 고증에 관한 노력은 1900년대를 재현한 세트 등 미술에서도 드러났다. 세밀함이 덜한 무대와 달리 영화는 스크린은 보다 정교함을 요구하는 만큼 더욱더 신경을 썼을 것 같다. 무대 장치도 공연 예술과 영상 예술이 다르다. 공연 예술은 거리가 있어서 아주 디테일하게 안 해도 되고, 상징적으로 표현해도 허용이 된다. 반면 영화는 소품 하나까지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기에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엄청난 고증을 거쳤다.
하얼빈역 장면의 경우 실제 하얼빈역에서 찍고 싶었는데, 현장 사진과 영상을 봤을 때 이미 너무 현대적으로 발전해서 그 당시 모습이 전혀 없었다. 여러 가지로 알아봤지만, 결국 하얼빈역은 세트로 갈 수밖에 없었다. 또 당시 실제 운행했던 기차는 물론이고, '누가 죄인인가' 장면 맨 마지막에 안 의사가 사형수가 타는 호송 마차를 타고 "누가 죄인인가"를 외치는 게 있다. 그것도 사진을 구해서 실제 크기 그대로 재현했다.안중근 의사 사형. 한중문화협회 제공 ▷ 의상 역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의상도 보통 죄수들은 재판받을 때 죄수복을 입는데, 그때 안 의사는 평상복 입고 재판을 받았다. 많은 서양 기자가 취재하는 등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소위 일본이 죄인의 인권을 유린하지 않는 선진국임을 보여주기 위한 거였다.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부분을 고증에 맞게 하려고 되게 많이 노력했다.영화 '영웅' 현장 라이브 스틸컷. CJ ENM 제공 관객에게 '좋은 뮤지컬 영화'로 다가가기 위한 고민과 노력
▷ 낯선 장르에 처음 도전하는 연출자로서 '뮤지컬 영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출발점에 섰을지 궁금하다. 사실 뮤지컬 영화 마니아가 아니라서 뮤지컬 영화를 하기로 한 때부터 뮤지컬 영화에 대해서 정말 많은 공부를 하게 됐다. 결국 뮤지컬 영화의 핵심은 노래도 대사의 일부분이라는 점이다. 좋은 뮤지컬은 노래를 들었을 때 '이건 노래, 이건 대사' 이게 아니고, 노래도 대사의 일부분이라고 관객이 느껴지는 게 훌륭한 뮤지컬이다.
▷ 그래서 선택한 방식 중 하나가 현장 라이브인 건가? 자연스럽게 대사를 하다가 갑자기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깨끗한 목소리의 노래가 나오면 관객 입장에서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영화에서 딱 빠져나올 수밖에 없고, 그럼 좋은 뮤지컬 영화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도 종류로 보면 딱 2개다. '레미제라블'처럼 일반 대사까지도 노래로 하는 송스루(대사가 아예 없거나 극도로 제한하고, 모든 대사를 뮤지컬 넘버로 처리하는 형식), 그리고 '라라랜드'처럼 대사와 노래가 섞여 있는 경우다.
그렇다면 영화 '영웅'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까 고민했을 때 우리나라 관객의 정서는 물론이고 나 역시 송스루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대사와 노래가 나뉘어져 있는 방식을 택했고, 노래와 대사의 비중을 몇 대 몇으로 할지 수없이 고민했다. 결국 한국 관객이 제일 편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비중이 50대 50이라고 생각해 '영웅'도 그 정도 비중으로 했다.영화 '영웅' 스틸컷. CJ ENM 제공 ▷ 뮤지컬 영화의 진입장벽 중 하나가 바로 대사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노래로 전환하는 거다. 이를 위해서 조명, 편집 방식 등 다양한 기술적인 요소들을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공연에서는 시퀀스가 넘어갈 때 주로 페이드인(fade-in, 어두운 무대나 화면이 점차 밝아지는 일)이나 페이드아웃(fade-out, 어느 장면의 끝에 화면이나 무대가 처음에는 밝았다가 차츰 어두워져서 사라지는 수법) 혹은 암전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시퀀스마다 페이드인&아웃 할 수 없고, 그러면 너무 단조로워진다.
영상 매체의 특성을 활용해야 했다. 장면 전환을 최대한 짧은 시간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게 알려줘야 한다. 컷으로만 하면 다음 시퀀스로 넘어갈 때 장면이 전환된 건지 아닌지 모를 수 있다.
조명도 장면 전환 기법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서 설희(김고은)가 '그대 향한 나의 꿈'을 부를 때 설희를 어둠 속에 홀로 있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 조명을 암전시키고 핀 조명(일정 부분에만 집중해서 빛을 비추는 것) 하나만 놓았다. '장부가'는 반대로 어둠 속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노래를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조명도, 장면 전환 편집도 최대한 활용했다. ▷ 주변의 걱정도 컸고, 힘든 점도 많았겠지만 그런 만큼 보람도 클 것 같다. 공연을 보신 분이 절대 실망하지 않게 하겠다, 그리고 전 세계 시장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내겠다는 뮤지컬적인 두 가지 목적과 안중근 의사를 제대로 다뤄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우리의 진심을 미리 본 분들이 알아주신 거 같아서 정말 감사하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