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교섭'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일러 주의
따뜻하지만 정확한 시선으로 사람과 세상, 생명을 포착했던 임순례 감독이 피랍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과 사명감, 한 개인의 입장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조명했다. 국민을 살려야 하지만 그렇기에 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중심에는 결국 '사람'이 있다. 영화 '교섭'이 보여줄 이야기다.
분쟁지역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들이 탈레반에게 납치되는 최악의 피랍사건이 발생한다. 교섭 전문이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처음인 외교관 정재호(황정민)가 현지로 향하고, 국정원 요원 박대식(현빈)을 만난다.
원칙이 뚜렷한 외교관과 현지 사정에 능통한 국정원 요원, 입장도 방법도 다르지만 두 사람은 인질을 살려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간다. 살해 시한은 다가오는데 협상 상대, 조건 등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서 교섭의 성공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 간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든 피랍자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 '교섭'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리틀 포레스트' 등 매 작품 인간에 대한 존중 어린 시선을 담아낸 임순례 감독이 사상 최악의 인질 사건에 투입된 외교관과 국정원 요원의 교섭 작전을 그린 영화 '교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구해야 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이 가진 고뇌와 사명감, 두려움 등의 순간을 포착해 진심 어린 시선으로 그려냈다.
영화는 지난 2007년 일어난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소재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던 국가의 이면을 파고든다. 당시 분당 샘물교회 교인들은 정부 지침을 무시하고 여행제한국가로 분류한 아프가니스탄에 선교 활동을 위해 몰래 입국했다가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 단체 탈레반에게 인질로 붙잡혔다. 당시 정부는 대면 협상을 진행한 끝에 살해된 2명을 제외한 21명 전원을 구출했다.
그러나 영화는 피랍 당시에도 의견이 분분했던 피랍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교섭'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피랍된 자국민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공무원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 소재인 실화가 당시에도 여러 논란이 이어졌던 만큼, 감독은 애초에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인질 교섭 과정'에 초점을 맞춰 교섭의 난맥상, 피랍자들을 구해내야 하는 이들의 고뇌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영화 '교섭'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거액의 몸값을 테러단체에 지불했다는 점을 두고 분열된 여론, '테러단체와의 협상은 없다'는 국제사회 원칙을 깨고 대면 협상에 나섰다는 비판 등 여러 목소리와 우려에도 국가는 왜 국민을 구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을까. 그 과정에서 어떤 고뇌와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는지, 피랍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정부 소속 공무원이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겪는 내적 갈등은 무엇인지, 왜 국가이기에 국민을 구해야 하고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지에 대한 딜레마 등 실질적인 교섭으로 가기까지의 여러 문제와 갈등, 고민, 감정 등이 폭풍처럼 뒤얽히며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인다.
영화의 제목처럼 진정한 교섭이 등장하는 건 영화 마지막, 대면 협상이 시작되고 정재호 실장이 탈레반 총사령관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때부터다. 영화의 모든 것, 앞서 보여줬던 모든 이야기는 바로 길지 않은 대면 교섭의 순간을 위한 과정이다.
탈레반 수장을 눈앞에 둔 목숨을 건 교섭 현장에서 정재호는 그저 자신이 가진 교섭에 관한 모든 것을 동원해 21명의 목숨은 물론 통역을 자처한 카심(강기영), 그리고 자신의 목숨마저 교섭의 성공 여부에 달린 상황에 놓인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한 정재호의 심경을 담아낸 황정민의 얼굴은, 그 순간만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교섭'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구해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인 비난이 있을 것을 감내하면서 결국 이 자리까지 왔어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릴 각오로 나선 이유 말이다. 대면 교섭에 나선 정재호의 얼굴과 그의 말 한 마디에 바로 '교섭'이 보여주고자 했던 모든 것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넘어야 할 산은 역시 '실화'다. 당시 피랍과 석방 과정, 그때 여론의 반응 등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영화의 내용이나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에 앞서 실화에서 기인한 선입견이 진입장벽을 만들 수 있다. 감독 역시 이러한 위험을 알았기에 영화는 창작된 인물들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고, 이야기 역시 '교섭'에 중심을 둔다.
또한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정확성'과 '객관성'이다. 최대한 '사실'을 반영하고자 했고, 피랍자에 대한 이야기는 미화나 왜곡을 배제한 채 영화 진행에 필요한 만큼의 최소한만을 배치했다. 그대로 보여주되 정재호와 박대식이 왜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고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결국 둘은 왜 서로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부각했다. 그러니 관객들 역시 '실화'보다 임순례 감독과 황정민, 현빈이 보여주고자 했던 영화에 초점을 맞춘다면 영화가 가진 힘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교섭'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우리는 황정민이 나온다고 하면 어느 정도의 기대를 갖게 되고, 역시나 이번 영화에서도 황정민은 그 기대치를 충족시켜 준다. 과거 회상 장면에서 순간 다른 재질의 모습으로 나오며 관객을 놀라게 할 현빈은 역시 멋있는 건 그가 다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렸다. 영화의 유일한 숨구멍이자 활력을 불어넣은 카심 역 강기영의 호연도 놓칠 수 없다.
한국 영화사에서 여성 감독이 100억 넘는 대작을 연출한 건 '교섭'이 처음이고, 임순례 감독은 자신이 구축해 온 세계를 그동안 활동해 온 틀보다 더 거대한 세계 안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이며 원하는 것을 그려냈다. '대작 상업 영화'라는 틀에 맞게 이에 맞는 그림과 이야기를 선사했다. 임순례 감독을 시작으로 임 감독은 물론, 다른 여성 감독의 대작 연출이 이어지길 바란다. 그들이 대작 상업 영화의 틀 안에서 최대한 자신이 가진 힘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더 많은 성공한 상업 영화를 만들어내길 기대해 본다.
108분 상영, 1월 18일 개봉, 12세 관람가.
영화 '교섭' 포스터.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