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판을 들고 있는 아본단자 감독. 한국배구연맹프로배구 여자부 흥국생명 마르첼로 아본단자(53·이탈리아) 신임 감독이 V리그 데뷔전부터 명장의 품격을 제대로 보여줬다.
아본단자 감독은 흥국생명을 처음 맡은 사령탑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적극적으로 소리치며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웠고, 경기 중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며 세세하게 지시를 내렸다. 또 상승세를 달리고 있는 팀에 자칫 혼란을 야기할까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승리는 명장다운 노련한 경기 운영을 보여준 아본단자 감독의 몫이었다. 흥국생명은 23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22-2023시즌 도드람 V리그 여자부 5라운드 한국도로공사와 홈 경기에서 세트 스코어 3 대 0(25-19, 25-17, 28-26)으로 이겼다.
이날 경기는 아본단자 감독의 V리그 데뷔전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경기 전 열린 아본단자 감독의 취임 기자 회견에는 평소보다 2~3배 많은 40명 남짓 취재진이 몰렸다.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는 흥국생명을 남은 시즌 동안 어떻게 우승으로 이끌지 그의 비전과 철학에 궁금증이 쏠렸다.
전술판을 보며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아본단자 감독. 한국배구연맹일단 팀을 본인의 입맛에 맞추기엔 시기상조라 보고 있다. 아본단자 감독은 "기본적인 철학은 하나로 뭉친 강한 팀을 만드는 것"이라며 "내가 하고 싶은 배구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아본단자 감독은 정규 리그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는 시점에 합류해 아직 팀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이에 "선수들이 적응하고, 나도 선수들에게 적응하는 게 우선이다. 일단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신중하게 말했다. 많은 변화를 주면 자칫 선수들이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단 아본단자 감독은 새로운 리그와 새로운 팀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18일 입국해 흥국생명과 계약을 마친 뒤 곧바로 다음날(19일) GS칼텍스와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 서울 장충체육관을 찾았다. 팀의 경기력을 점검하고 남은 시즌을 어떻게 치를지 구상했다.
GS칼텍스전을 지켜본 아본단자 감독은 현시점에서 선수들의 경기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전술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최근 옐레나를 아웃사이드 히터로 이동시켜 김연경과 대각을 이루게 하는 로테이션을 이날 도로공사전에서도 가동했다. 그는 "지난 경기와 같은 로테이션이다. 유럽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적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흥국생명이 보여준 전술과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아본단자 감독의 열정이 담긴 지휘 아래 팀은 한층 견고해진 모습이었다. 이날 도로공사를 상대로 공격 득점(65점-48점)과 성공률(43.10%-20.64%), 블로킹(11개-7개)에서 모두 앞선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다.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전술판에 대해 설명하는 아본단자 감독. 인천=김조휘 기자경기 중 아본단자 감독이 손에 쥐고 있던 전술판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작전 타임 때마다 선수들에게 전술판을 들이밀며 세세하게 지시를 내렸다. 경기 내내 그의 전술판에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아본단자 감독은 경기 후 자신의 전술판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이 작전판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다"고 운을 뗀 뒤 "선수들이 블로킹과 수비를 어디로 해야 하는지, 각 랠리에 대한 전술을 체크해 둔 판"이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배구 철학에 대해서도 설명을 이어갔다. 아본단자 감독은 "나는 블로킹이나 수비, 서브를 어디로 넣어야 하는지, 경기 중 바꿔야 하는 부분 등에 대해 이걸 가지고 지시하는 편"이라며 "이미 수비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천천히 가려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구 여제' 김연경(35)도 아본단자 감독의 합류에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감독님께서) 시즌 중간에 오셔서 많은 걸 바꾸려고 하진 않는다. 기본적이고 디테일한 부분을 강조하고 계신다"면서 "서브와 블로킹, 수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계신다. 그런 부분 앞으로 많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다"고 기대했다.
팀은 물론 한국 생활에도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아본단자 감독은 "한국의 모든 음식이 맛있다. 특히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고 미소를 지었다. 이어 "오늘 승리를 기념하는 저녁 식사에 파스타는 거절하겠다. 이탈리안을 만족시키는 파스타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최근 한 달 넘게 사령탑 없이 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르던 흥국생명에 '마지막 퍼즐'인 아본단자 감독이 부임하면서 분위기가 한껏 올라왔다. 현재 정규 리그 6경기를 남겨둔 가운데 2위 현대건설(승점 62)을 2점 차로 따돌리고 여유 있게 1위(승점 69)를 달리고 있는 흥국생명이 아본단자 감독의 지휘 아래 우승 트로피와 함께 마지막에 환하게 웃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