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 대동홀에서 열린 '오늘의 증언이 5·18진상규명의 첫걸음이다'. 박성은 기자5·18 두 공법단체(부상자회·공로자회)가 지역사회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해 대한민국특전사회와 손을 잡고 증언 행사를 개최했지만 기존에 나왔던 증언들을 넘어서진 못했다.
14일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 대동홀에서 5·18 공로자회와 부상자회가 대한민국특전사동지회와 '오늘의 증언이 5·18 진상규명의 첫걸음이다'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진압군으로 투입됐던 3공수여단 3대대 출신 중사 김귀삼(68)씨와 5·18 당시 시민군으로 부상자 이송 역할을 했던 김태수(68)씨가 참석해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김귀삼씨는 "1980년 5월 20일에 광주역에 와서 전남대 현장에 투입됐다"며 "처음 배치된 광주 신협 광장에서는 우리들에게 실탄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포를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광주교도소에 배치돼 진압했던 현장에 대해서는 "전남대학교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시민들을 트럭에 태워서 광주교도소 마당에 내렸다"면서 "교도소에 도착하자마자 실탄이 지급돼 받은 임무는 교도소에 접근하는 차량을 잡으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발포 명령과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또 "접근하는 차량을 막기 위해 보리밭에 숨어 바퀴를 향해 총을 쏘려고 했다"면서 "아무리 바퀴에 쏘려고 해도 사람에게도 쏠 수 있고 사망자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귀삼씨가 실탄을 발사했다고 증언하자, 당시 시민군으로 광주교도소 부근에 있었다는 김태수씨는 발포 당시 상황에 대해 반문했다.
김태수씨는 "당시 시민들은 교도소에 들어갈 수 있는 정문이 아닌 고속도로 쪽으로 1km 떨어져 있었는데 왜 총을 쐈는지 모르겠다"며 "교도소로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인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왜 발포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3공수여단 3대대 중사 출신 김귀삼씨가 광주역 진압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박성은 기자김귀삼씨는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시신들을 싣고 오는 과정에서 당시 시신들에 실탄 자국이 남아있었다고도 증언했다.
김귀삼씨는 "교도소로 다친 시민들과 시신을 싣고 오는데 한 시신 인중에 총을 맞은 자국이 있었는데 당시 전남대학교에서 진압 작전을 할 때는 실탄을 지급받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며 "옆대대에서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을까 짐작했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에 대해서도 김귀삼씨가 당시 상황을 전했다.
김씨는 "5·18민주화운동 이후 1년 정도 지나고 보안사에서 (암매장에 대해) 조사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증거를 없애주고 있다고 생각했다"며 "교도소 뒤쪽에 시신을 묻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없다. 실종자 찾는 활동 많이 하고 있지만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귀삼씨는 2월 19일에 열렸던 대국민 선언식에서 계엄군을 피해자로 표현한 것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김씨는 "5·18민주화운동 이후 전역을 해서 고향인 광주에 왔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고향 사람 죽이러 왔다며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며 "명령에 따라 죽는 것을 또 하나의 큰 명예로 생각하는 군인으로서 5·18 당시에는 상급자의 명령에 의해서 작전을 한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전우들이 더러 있음에도 광주에서는 군인들이 가해자라고 손가락질하는 불명예까지도 가지고 있다"며 "나라에 충성한 것이 가해자인가 되묻고도 싶다"고 말했다.
김태수씨는 "지난 날 3공수여단 출신 군인은 죽이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며 "막상 당사자들을 만나보니까 용서가 되고 그 사람들도 이렇게 트라우마 있고 고생을 하는구나 싶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 이후 김귀삼씨는 국립 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5·18부상자회와 공로자회는 오는 21일 7공수여단 , 28일 11공수여단 출신 계엄군 증언 행사를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