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김건태씨가 자녀 지완군과 '100인의 아빠단' 놀이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김건태씨 제공▶ 글 싣는 순서 |
①북적이는 집에서 사랑 넘치는 8남매…"서로 가장 좋은 친구" ②평균 출산율 3명인 교회…"아이 함께 키워준다는 믿음 덕분" ③다섯 남자아이 입양한 부부…6형제가 만드는 행복의 모양 ④부모는 슈퍼맨이 아니야…'같이 육아'로 아빠도 배운다 (계속) |
"전에는 아이에게 '안 돼', '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했어요. 아이는 더 가까이 가고 싶고, 더 만져보고 싶은데 저는 '분명 넘어질 거야', '놀랄 거야' 하는 제 생각을 우선했죠. 지금은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아이는 어떤 생각일까'를 가장 먼저 생각해요"
17년 차 직장인 김건태(40)씨는 '100인의 부산 아빠단' 활동을 되짚으며 인터뷰 내내 "배웠다"는 표현을 반복했다. 맞벌이 부부로 지완(7), 민준(2) 두 아들을 기르는 그는 지난해 5월부터 12월까지 '100인의 부산 아빠단' 6기로 활동한 끝에 상위 5명을 선발하는 '최우수 아빠'로 뽑혔다.
평범한 '초보 아빠'였던 김씨는 자녀 육아를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하다가 온라인 검색을 통해 '아빠단'을 접했다. 초보 아빠들이 다양한 체험 활동을 통해 육아 고민과 비법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설명에 주저 없이 참여를 신청했다.
육아 전선 뛰어든 직장인 아빠…"자녀 통해 나 자신 성장"
'100인의 아빠단'은 보건복지부와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전국 17개 시·도와 함께 지역별로 매년 만 4~7세 자녀를 둔 아빠 100명을 선발해 운영하는 육아 프로그램이다.
아빠단에 선정되면 온라인 카페를 통해 건강·놀이·교육·관계·일상을 주제로 한 주마다 미션을 받아 수행한다. 미션은 '아이와 눈을 맞추고 난 뒤, 눈빛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지 아빠가 표현해 보기', '길가에 핀 꽃을 보며 아이와 대화 나누기' 등 다양한 주제가 부여된다. 아빠가 아이와 함께 활동한 뒤 게시판에 인증 사진과 내용을 올리면, '멘토'가 답글을 통해 잘한 점이나 보완할 점을 피드백한다.
김씨는 직장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매주 제시된 서른 가지 넘는 미션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모두 수행했다. 아이와 함께 활동하다 보니 전보다 심리적으로 가까워진 건 물론이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경험까지 얻었다.
아빠 김건태씨가 아들 지완군과 제기차기, 딱지치기를 하는 모습. 김건태씨 제공김씨는 "지완이가 다녔던 유치원을 단둘이 걸은 적이 있다. 아이는 내게 친구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줬는데, 자기 생각과 속마음을 터놓는 걸 들으면서 '아이가 아빠를 소울메이트(영혼의 동반자)로 생각하는구나'라는 게 느껴져 크게 감동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아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오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자라고 있는지 대화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됐다. 아이를 통해 나도 인생을 배운 것"이라며 "그전까진 아이를 마냥 어린애로 보고 늘 울타리 안에서 지키려고만 했는데, 너무 그렇게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00인의 부산 아빠단'에는 각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온라인 미션에 더해, 20명씩 조를 이뤄 부산 주요 관광지를 여행하는 오프라인 미션도 있다. 부산관광포털 '비짓부산'에 나온 추천 여행지를 다른 아빠·자녀들과 함께 다녀오는 프로그램이다.
김건태씨와 두 자녀가 갯벌 체험을 하는 모습. 김건태씨 제공김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를 묻자, 주저 없이 '을숙도생태공원'을 꼽았다. 김씨는 "가족끼리 갔다면 평상 위에 앉아 쉬거나 자전거를 탔을 건데, 다른 아빠들과 가니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며 웃었다.
그는 "을숙도에 간 날 하필 비가 내려 모두 당황했다. 아빠들은 비가 그치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들이 갑자기 밖에 나가 비를 맞으며 놀기 시작했다"며 "아이들 노는 게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가 없었다. 모두 어릴 적 동네에서 비 맞으면서 친구와 놀던 추억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이어 "평소에 비가 오면 늘 아이에게 우산 씌우고 비를 안 맞게만 했지, 이렇게 노는 걸 가르친 적은 없다"며 "내가 가르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새로운 경험을 아이에게 체득하도록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걸 그 자리에 있던 아빠들 모두가 배웠다"고 덧붙였다.
공동체 함께 하는 '같이 육아', 인식 전환이 먼저
비슷한 연령대 자녀를 둔 아빠들이 한데 모이니 자연스레 육아 고민이나 고충을 주고받았다. 아빠들이 '100인의 아빠단' 프로그램을 스스로 찾아보고 활동을 시작한 근본 이유도 육아가 "군대 훈련소에 한 번 더 온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서툴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빠단 활동을 통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아빠들 모습을 보면서 김씨는 '같이 육아'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김씨는 "어렸을 때 이웃집에 놀러 가서 그 집 친구들과 같이 놀면서 자랐던 기억이 있다. 예전에는 이웃집 담장이 지금보다 낮았고, 동네에서 아이를 같이 키운다는 개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사라지면서 부모가 만능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엄마, 아빠가 육아 지식도 많아야 하고 교육도 알아야 하고 아플 때는 의사도 돼야 하는데, 사실 부모는 그렇게 전지전능하지 않다. 어른이라도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며 "부모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 단체나 사회 곳곳에 숨은 전문가들이 '집단 지성'으로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세상이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아빠들도 '아빠단'에 많았다"고 덧붙였다.
김건태씨와 비슷한 연령대 자녀를 가진 아빠가 함께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김건태씨 제공사회 공동체가 아이를 함께 키우는 '다함께 돌봄'이 실현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김씨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제도 마련 이전에 '인식 전환'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프로야구단에서 일하는 김씨는 스포츠 마케터라는 직업 특성상 출장이 잦았다. 그런 김씨가 '100인의 아빠단'으로 활동하며 자녀 육아에 뛰어들 수 있었던 건 회사의 배려 덕분이었다.
김씨는 "출장이 거의 없는 내근직으로 자리를 옮겨준 회사의 배려가 없었다면 육아가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성 육아휴직도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구성원들이 신경을 많이 쓴다"며 "작은 팀 단위, 회사 단위에서 출산이나 육아에 전념하게 하는 환경이 조성되다 보니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분위기가 잘 조성된 회사는 공동 육아가 가능한데, 그렇지 않으면 힘든 게 사실이고 출산이나 육아에 대한 허들도 여전히 높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며 "부모가 출산과 육아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에 내몰리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쪽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육아로 커지는 가족의 소중함…"아이와 함께면 세상 달라져"
김씨는 자녀 육아를 이야기하면서 아내와 장인·장모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장인·장모는 육아 초기 맞벌이하는 김씨 부부를 위해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았고, 아내 김아현(38)씨는 100인의 아빠단 활동 내내 옆에서 김씨가 놓치는 부분을 꼼꼼하게 챙겨줬다.
김씨는 "맞벌이 부부가 양육 초기 아이 둘을 돌보는 건 솔직히 힘든데, 기관에 보내기 전까지 장인·장모가 많이 도와준 덕분에 부담을 덜 수 있었다"며 "아빠단 활동으로 첫째와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아내가 직장을 다니는 상황에서 둘째를 조금 더 돌볼 수밖에 없었는데도 누구보다 많은 지지를 해줬다. 너무 사랑하고 또 감사하다"며 미소 지었다.
김건태씨 가족 사진. 김건태씨 제공연중 가장 업무가 많은 프로야구 개막 시기지만, 김씨는 틈이 날 때마다 첫째 지완 군의 학교에서 진행할 부모 직업 체험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이 새로 사귄 친구들 앞에서 '스포츠 마케터'라는 직업을 소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업무로 지치거나 힘이 들 때면 가끔 스마트폰을 꺼내 두 아들을 위해 만든 자장가를 듣는다. 지난해 '아빠의 자장가' 공모전에 출품해 상을 받은 곡으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첫째와 목소리가 큰 둘째가 뜻을 넓게 펼치길 바라며 가사를 직접 썼다. 이렇듯 마냥 어렵고 힘들기만 할 것 같았던 육아는 어느새 김씨에게 가족의 소중함과 일상의 행복을 선물하는 소중한 행위로 자리 잡았다.
김씨는 "아이를 통해서, 아이와 함께하면서 배울 수 있는 가치와 행복이 상당히 크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 세상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이유를 알 것 같다"며 "당장 두려움에 출산이나 육아의 꿈을 늦추거나 접으려 하기보다는, 아이와 함께 인생을 배운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값진 시간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