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의 '진실버스' 일정 중, 지난 1일 부산시민공원에서 인쇄물을 배포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가족들. 박희영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진실버스 오른 이태원 참사 유족들…전국 순례하며 독립조사 촉구 ②"지금쯤 여행을 갔겠죠"…유가족은 왜 '진실버스'에 올랐나? ③[르포]"유가족도 모이면 가끔 웃어요"…연대·치유의 '분향소' ④[르포]"네가 살아야 자식 한 푼다"…단장지애 헤아린 '오월의 어머니'들 ⑤[르포]"놀고 앉았네"…죄 없는 자처럼 돌 던지는 당신들 ⑥[르포]'불쏘시개 전차' 대신 '방화범'만 기억하는 사회 ⑦[뒤끝작렬]"10·29 이태원참사,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끝)
|
"회원님, 지난주 운동은 왜 못 나왔어요?"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독립조사기구 설치를 촉구하면서 버스를 타고 10일간 전국을 순회했는데, 저도 동행 취재했거든요."
"이태원 참사는 꽤 지난 일 아니예요?"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함께 '진실버스'를 타고 열흘간 출장을 다녀온 이튿날 오전 헬스장에서 트레이너와 나눈 대화다. 지난 150여일의 시간은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았다. 이태원참사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나조차도 어느새 시간이 흐르자 진실버스에 오르기 직전까지 동행 취재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터다. 150여일이 지난 지금, 이태원참사 유가족의 목소리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중요한 이유는 뭘까.
참사 150일째 되던 지난달 27일, 4명의 유가족을 태운 진실버스는 서울을 출발해 10일에 걸쳐 전국 13개 도시를 순회했다. 충남 홍성에서 온 가영 엄마, 대전에서 온 채림 아빠, 경기 시흥에서 온 지민 아빠, 서울 용산구민 유진 아빠. 사는 곳도 삶의 방식도 제각각이었을 이들은 이태원참사로 자녀를 잃고 같은 얼굴을 갖게 된 듯했다. 5060의 눈물을 이렇게 흔하게 볼 날이 또 올까 싶을 정도였다. 이들 사이 눈치 없이 끼어든 외부자로서 열흘간 동행하며 이들을 관찰했다.
평소에는 심각한 듯 표정이 없다가도 동그랗게 자른 커트머리에 귀여운 얼굴을 가진 가영 엄마. 그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곤 했다. 가영 엄마가 "기자님 왜 웃어요? 무슨 할 말 있으세요?"라고 물어도, 나는 '우리 엄마를 닮아 정감이 간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벚꽃을 보고도, 맛있는 음식을 맛보다가도 울컥하는 그를 보며 나는 말을 아껴야 했다.
유진 아빠가 애지중지 키운 하나밖에 없는 딸은 미국 뉴욕대에서 음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아직 딸의 사망신고도 하지 못한 그는 참사 5개월여가 지나 진실버스에 올랐다. 코로나19를 피해 잠시 한국에 들어온 딸에게 얻어준 이태원동의 작업실. 유진은 그저 작업실 앞에 잠시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가 인파에 휩쓸렸다. 축제를 즐기러왔던 이들, 근처에 살던 동네 주민, 그저 호기심에 구경왔던 이들…이태원참사로 희생된 인파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진실버스를 타고 이태원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하는 동안 가장 놀라웠던 것은 '어떻게 저렇게 함부로 유가족을 대할 수 있을까?' 싶은 순간을 목격할 때였다. 일면식도 없는 시민들도 '이태원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라는 사정을 어렴풋이 알면 대부분 안타까워하고, 유가족을 응원하고 위로했다. 그런데 유가족을 '정치 선동꾼'으로 대하는 이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부산에서 만난 한 중년 여성은 유가족을 향해 다짜고짜 "이태원 그만해라"라며 고함을 치는가 하면, 경남 진주에서 만난 한 청년은 유가족 면전에서 "놀고 앉았네"라는 말을 내뱉었다. 마치 '참사 유가족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류영주 기자
참사 159일째인 지난 5일, 진실버스가 서울로 복귀하던 날을 기한으로 내걸고 서울시는 유가족에 서울광장 분향소를 철거하자고 '제안'했다. '선 철거 후 논의'로 받아들인 유가족이 거절하자, 서울시는 "유족과 대화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라며 변상금 약 2890만 원을 부과했다. 유가족을 함부로 대하는 이들의 과감함 뒤에는 서울시처럼 재난을 관리하고 책임져야 할 기관이 유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있지 않았을까.
유가족의 시간은 참사 당시에 여전히 멈춰있다. 2022년 10월 29일 이전까지 평범한 일상을 누리던 시민들이 왜 길 위에서 숨막혀 죽어야 했는지 어떤 국가기관도 속시원히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국가는 유가족이 제기하는 수많은 의혹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유가족과 국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시간은 지금도 저마다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다. 국가는 참사가 벌어진 바로 다음날 오전,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를 설치해 '관제 애도'를 서두르더니, 이제는 이태원 참사를 흘러간 일로 치부하며 '시민들의 광장'에서 그만 사라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유가족이 진실버스를 타고 전국을 순회하며 시민들에게 건넨 인쇄물의 제목은 "10·29 이태원참사,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습니다"였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거슬러 유가족의 멈춰서버린 시간에 보폭을 맞췄던 열흘 이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며 문득 이 말이 우리 사회를 향한 경고처럼 들렸다. 책임을 모르는 국가에서 누구라도 재난에 휩쓸려 '유가족'이 되는 순간, '시민 아닌 자'가 되어 뒤쳐지길 각오하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