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열린 제287회 인천시의회 2차 본회의에서 '주택 전세사기 대책 촉구 결의 보류동의안' 표결 결과. 인천시의회 영상회의록 화면 캡처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세사기 피해자가 발생한 인천에서 인천시의원들이 오히려 피해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정치 행보를 보여 뒷말이 무성하다.
전세사기 최대 피해 지역 의회에서조차 '선(先) 구제 후(後) 환수' 방안을 말하지 않는데 국회에서 이를 귀 기울여 들을 리 없다는 비관론이 나온다.
상임위선 만장일치 가결, 본회의선 보류된 '전세사기 대책 촉구 결의안'
인천시의회 전경. 연합뉴스25일 인천시의회에 따르면 시의회는 최근 열린 제287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주택 전세사기 대책 촉구 결의안에 대한 보류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다시 말해 조례안의 찬반을 표결하지 않는 것, 즉 '정부와 국회에 제대로 된 주택 전세사기 대책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류하겠다고 결정한 것인데 이러한 결정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우려스럽다.
애초 '전세사기 대책 촉구 결의안'이 발의된 건 지난달 27일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인천시의원 전원이 이 결의안을 발의했는데, 이달 12일 열린 담당 상임위원회인 건설교통위원회에서도 만장일치로 원안 가결됐다.
이 결의안은 '선(先) 지원 후(後) 구상권 청구'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정부가 전세사기를 사회·경제적 재난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인천시의회의 입장을 대통령실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국무총리, 법무부, 국토교통부, 인천시, 경찰청, 인천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주택도시보증공사 등에 보내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결의안이 나온 건 이른바 '빌라왕', '건축왕', '천년 빌라왕' 등 전세사기 주범들이 소유한 주택 대부분이 인천에 몰려 있고 그 가운데서도 미추홀구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인천시가 자체 분석한 자료를 보면 전세사기 주범 3명이 인천에서 모두 3008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2523채가 미추홀구에 집중됐다.
인천 군·구별 전세사기 피의자 주택 소유 현황 표. 인천시의회 제공당시 이 결의안을 심사한 인천시의회 건설교통수석전문위원은 "시의적절하다"고 평가했다. 인천시 역시 "큰 틀에서 결의안이 국회에 전달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동의했다. 국민의힘 소속 시의원 5명과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의원 3명으로 구성된 건설교통위원회 위원들도 모두 '원안 가결'하자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인천시의회 본회의 상정되면서 갑자기 다른 상황에 직면했다. 국민의힘 소속 시의원들이 의원총회를 열어 이 결의안을 '보류'시키자고 결정한 것이다. 그 이유는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만 결의안 발의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인천시의회 국민의힘 한민수 원내대표는 "애초 민주당 소속 시의원 14명만 공동발의자로 올라온 게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생색내기'와 '정치셈법'에만 몰두한 정치…피해자들 "뒤통수 맞은 느낌"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가 18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집무실 앞에서 정부 여당의 특별법을 규탄하고, 피해자 인정 범위 확대, 보증금 회수 방안 보완 등의 해결책 마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국민의힘이 결의안 보류를 하기 위해 내놓은 논리는 "이미 국회와 정부가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대책을 잘 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 지켜본 뒤 입장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인천에서 국회와 정부에게 우리의 의견을 전달하자"는 취지의 결의안에 대해 "그들이 내놓는 결과물을 보고 결의하자"고 논의의 순서를 바꾼 것이다.
결국 '주택 전세사기 대책 촉구 결의안에 대한 보류 동의안'은 재석 의원 36명 중 23명의 의원이 찬성했고, 13명 의원은 반대했다. 인천시의회는 국민의힘 소속 시의원 26명과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의원 14명 등 모두 40명으로 구성됐다.
인천시도 결의안을 심사한 인천시의회 사무국도, 담당 상임위원회도 모두 찬성한 결의안은 결국 국민의힘 소속 시의원들의 정치적 셈법 때문에 좌초됐다.
이같은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비단 국민의힘 만 비난할 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애초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의원들끼리 결의안을 발의할 때도 그 속셈은 '생색내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는 결의안이지만 민주당이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주장을 할 명분을 만드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생색내기 목적의 결의안이라고 할지라도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결의안을 통과시켜달라고 모든 시의원들에게 문자폭탄을 보내는 등 이 결의안에 모든 것을 걸었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 안상미 위원장은 결의안을 보류한 인천시의회에게 "다른 지역보다 인천에 전세사기 피해자 수가 많은데도 대책 촉구 결의안조차 통과되지 못하다니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고 한탄했다.
'피해자'없는 '피해자 지원 대책'…잇따라 세상을 등지는 피해자들
24일 인천시 미추홀구 길가에 주차된 차량에서 전세사기 피해자인 40대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사진은 A씨가 살던 미추홀구 아파트에 도시가스 검침 안내문이 부착된 모습. 연합뉴스인천시의회가 '전세사기 대책 촉구 결의안' 표결을 보류한 지 이틀 뒤 정부와 국회는 보증금 회수 방안을 뺀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에 합의했다.
이 법안은 최우선변제금을 못 받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현재 기준의 변제금만큼 최장 10년간 무이자로 빌려주고, 이를 초과하는 전세보증금은 1~2%의 낮은 금리로 대출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이 법안이 통과되면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사실상 전세보증금을 되돌려받지 못하게 된다.
피해자들은 정부가 보증금을 먼저 돌려주고 나중에 사기 피의자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라는 이른바 '선(先) 구제 후(後) 회수' 방안을 요구했지만, 정부와 여당은 이 방안이 다른 사기 피해자들과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증금을 떼인 피해자들을 돕는 특별법이지만 정작 보증금을 되돌려받는 방안은 논의하지 않은 이 법안이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지난 24일 또 한 명의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1명이 세상을 등졌다. 석달 새 벌써 5명이 전세사기 피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 전세사기 피해로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은 모두 전세보증금 가운데 최우선변제금만 돌려받거나 아예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정부의 지원대책도 받을 수 없었다.
자신들을 뽑아 준 시민들이 전세사기로 우는 상황에서 인천시의회도 국회도 그들을 위해 머리를 맞댄다고 하고 있지만 정작 그 논의에 '피해자'들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있는데도 그들의 입장조차 내지 못한 인천시의회의 결정은 지방의회가 시민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다른 지역 지방의회들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다음은 인천시의회가 '전세사기 대책 촉구 결의안'을 어떻게 논의했는지를 기록한 제287회 제3차 건설교통위원회 회의록과 제287회 제2차 본회의 회의록 전문이다. 회의록은 인천시의회 홈페이지에서 누구든지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2일 열린 인천시의회 제287회 제3차 건설교통위원회에서 '주택 전세사기 대책 촉구 결의안' 심사 부분 회의록 전문. 인천시의회 제공 지난 19일 열린 제287회 인천시의회 2차 본회의에서 '주택 전세사기 대책 촉구 결의안' 표결 당시 회의록 전문. 인천시의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