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귀공자' 스틸컷. NEW 제공※ 스포일러 주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자기만의 세계관이 확고한 장르 영화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 중 하나가 바로 박훈정 감독이다. 그의 특기 역시 장르 영화에 걸맞은, 만화적 상상력 가득한 개성 강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귀공자'는 감독이 자신의 장기를 십분발휘해 그 어느 때보다 간명하게 만든 캐릭터의, 캐릭터에 의한, 캐릭터를 위한 영화다.
필리핀에서 불법 경기장을 전전하며 병든 어머니와 살아가는 복싱 선수 마르코(강태주)는 어머니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평생 본 적 없는 아버지를 만나러 한국으로 향한다. 그런 그의 앞에 정체불명의 남자 귀공자(김선호)가 나타나 그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마르코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숨통을 조여 오는 귀공자를 필두로 마르코를 집요하게 추격하는 재벌 2세 한 이사(김강우), 필리핀에 이어 한국에서 우연히 마르코와 재회한 미스터리한 인물 윤주(고아라)까지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은 단 하나의 타깃을 쫓아 모여든다. 그리고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혼란과 광기 속 마르코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 '귀공자' 스틸컷. NEW 제공일단, 타이틀롤을 연기한 배우 김선호의 논란은 뒤에서 언급하고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한다. '귀공자'는 오프닝부터 주인공 귀공자의 정체성, 즉 있는 그대로 말하면 '해맑은 미친놈'이고 조금 정돈해서 표현하자면 '해맑은 광인(狂人)'을 명확하게 보여주며 시작한다.
캐릭터성이 짙은 영화라는 걸 알린 '귀공자'는 크게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다면, 전반은 '왜?'라는 의문으로 가득하다. 귀공자 등장부터 이후 주요 캐릭터가 하나씩 나오고 마르코라는 한 인물을 두고 쫓고 쫓기는 추격이 시작되면서 '왜?'라는 의문은 더해지고 쌓여간다. 추격의 이유도, 추격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있다. 그 가운데서 명확한 건 오로지 '캐릭터'뿐이다.
일단은 모든 인물이 마르코 한 명을 뒤쫓듯이 관객도 의문과 궁금증을 한가득 안고 캐릭터들을 쫓아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결국 관객이 쫓고 집중하게 되는 건 왜 쫓아야 하는 건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캐릭터다. 그리고 이는 '귀공자'라는 영화가 가진 본질과도 닿아있다.
영화 '귀공자' 스틸컷. NEW 제공'귀공자'는 서사보다 '캐릭터'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추격전의 이유 역시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 이유 역시 캐릭터의 정체가 하나둘 밝혀져야 비로소 알게 되는 부분이다. '귀공자'는 각 캐릭터의 성격과 특성을 명확하게 스크린에 그려내면서 캐릭터를 보는 재미를 중심에 뒀다. 그렇기에 캐릭터에 집중하는 게 중요했고, '왜'라는 요소를 꽁꽁 감춰두고 무조건 캐릭터들을 쫓아가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 명확한 구조다. 그렇기에 의문만 가득한 전반부는 다소 루즈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후반부부터는 물음에 대한 답이 쏟아지며 속도감을 높인다.
그리고 이 영문도 모르는 추격전에 가담하도록 만들기 위해 중요한 건 마르코다. 마르코 역시 영문도 모르고 귀공자를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에 쫓기고 목숨을 위협받는다. 모른다는 두려움, 쫓긴다는 두려움,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두려움이 얽히고설키며 만들어 낸 공포를 신인 배우 강태주가 눈빛과 행동 하나하나에 잘 표현해냈다. 덕분에 마르코를 따라가는 관객 역시 그의 감정에 동화되며 이 알 수 없는 추격전에 보다 몰입하게 된다.
영화 '귀공자' 스틸컷. NEW 제공또 하나 주목할 인물은 주인공 귀공자다. 이름도, 마르코를 쫓는 이유도,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 귀공자는 흥미로운 설정을 갖고 있다. 깔끔 떠는 해맑은 광인이라는 캐릭터를 마냥 무겁게 끌고 갔다면 기시감을 느꼈겠지만, 여기에 '유머'를 더함으로써 조금은 색다른 결의 광인을 완성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알 수 없는 귀공자의 의문 중 마르코를 추격한 이유를 접하고 나면 '다크 히어로'라는 단어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히어로의 면모와 정반대인 데다 도덕적인 결함까지 갖고 있지만 행동의 결과물이 선(善)의 영역에 닿아있는 캐릭터를 보통 다크 히어로라 부른다.
그러나 귀공자는 아무리 '히어로'를 붙이기에도, '다크'를 붙이기에도 애매한 지점에 놓인 캐릭터다. 결과적으로는 정의로운 길이었다 한들 다크 히어로 캐릭터에서 은근하게 보이는 얄팍한 도덕의 흔적보다는 마치 어린아이에게서 볼법한 얼핏 무해해 보이는 선과 악이 혼재된 양면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크 히어로라는 수식어 대신 그저 그의 속성인 '해맑은 광인'이란 수식이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다.
영화 '귀공자' 스틸컷. NEW 제공이러한 점에서 영화의 재밌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귀공자'(The Childe)라는 제목과 영화 속 캐릭터와 서사와의 연관성이다. 극 중 코피노(Kopino, 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에게 '귀공자'라는 이름을 달아준 건 영화와 현실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대한 반어적인 표현이다. 반대로 도련님의 위치에 선 이에게는 귀공자라는 타이틀을 부여하지 않았다.
다양한 멸시의 언어로 그려지는 코피노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 부와 권력을 쥔 한 이사다. 사회적으로나 스스로를 고귀하다 일컫는 존재를 응징해 차별과 멸시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이 그 반대에 선 코피노 아이라는 점은 제법 직설적인 감독의 화법이다.
굳이 귀공자에게 '귀공자'(Childe)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현실과 영화에 존재하는 차별의 대상인 코피노 아이(Child)에 대한 감독의 조그마한 선물이자, 그 단어가 단지 부와 권력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겉보기엔 귀공자처럼 멀끔해 보이면서 해맑은 듯 잔인한 속성은 마치 아이 같은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제목은 여러모로 언어유희처럼 다가온다.
영화 '귀공자' 스틸컷. NEW 제공
귀공자 캐릭터를 찰떡같이 소화해 낸 김선호와 신인임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강태주, 더 보고 싶은데 아쉽게 퇴장한 고아라의 연기는 말할 것 없이 뛰어나다. 그러나 '귀공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한 이사 역의 김강우다. 그동안 많은 작품에서 여러 모습의 빌런으로 활약한 김강우지만 이번 영화에서만큼 그의 연기력은 물론 캐릭터로서도 빛났던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입었다. 아마 김강우의 진가는 '귀공자'를 기점으로 나뉠지 모른다.
'귀공자'의 진입장벽은 청소년 관람 불가의 등급이 아니라 어쩌면 타이틀롤을 맡은 김선호일 수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김선호와 그를 안고 간 박훈정 감독의 의지가 '귀공자'의 리스크로 작용할지 아니면 새로운 캐릭터를 입고 변신에 성공한 김선호가 리스크를 반전시킬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이다.
118분 상영, 6월 21일 개봉, 쿠키 1개 있음,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귀공자' 포스터. NEW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