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모습. 해당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양형욱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르포]"울면서 알파벳 써요"…4살배기도 몰아치는 사교육風 ②[르포]물수능도 '족집게 예측'…학원가는 요지부동 (계속) |
정부가 '사교육 카르텔'을 근절하겠다며 사교육 업계를 상대로 엄포를 놓고 나섰지만, 대한민국 '사교육 일번지'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는 여전히 '잘' 나간다.
'장수생'으로 신분을 숨긴 기자가 직접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학원가 분위기를 살펴봤다. 수능을 5개월 여 앞두고 나온 정부의 '깜짝 발표'는 학원가에 오히려 '호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갈팡질팡' 교육정책?…믿을 건 '학원' 뿐
지난 25일 아침 대치동 한 학원. 기자는 30분 일찍 학원에 도착했지만, 이미 강의실 맨 앞 자리는 마감됐다. 수험생 70여 명 중 제일 앞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교실문이 열리기 50분 전부터 학원에 도착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강사는 '킬러문항을 삭제하겠다'는 정부 발표에 대한 입장을 꺼내기 시작했다. 졸고 있던 학생들도 고개를 들고 강사의 말에 집중했다.
"너희가 수능 공부 시작할 때부터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방향이랑 정부가 가려고 하는 방향이 서로 같아"
"내가 가진 정보가 제일 빠를 거고 맞을 거야. 바로 바로 알려줄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시키는 것만 하자"호언장담한 강사는 자신의 정보력과 네트워크를 앞세우며 수능에 다뤄질 지문 분야 등 출제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예고'했다. 출제 가능성이 높은 제재, 문제 유형 등을 몸에 익히려면 새롭게 마련한 커리큘럼을 잘 따라오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누구보다 발 빠르게 입시에 대응하는 대치동 학원가는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날 하루 이 학원에만 기자 외에도 4명의 학생이 새로 등록했다. 학원 직원들은 대통령이 지적한 수능 비문학에 대비하기 위한 문의가 오히려 늘었다며 관련 교재를 사려는 수험생들을 따로 확인하기도 했다.
학원가의 발 빠른 대응에 학생들이 사교육에 보내는 신뢰는 더 깊어졌다. 기자가 대치동에서 만난 수험생들마다 하나같이 학원을 계속 다니겠다는 반응뿐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은 오후 수업을 듣기 위해 서둘러 교실을 나섰다. 학원에서 만난 재수생 차선우(가명, 19세)씨도 이중 하나였다.
올해 초부터 학원을 다닌 차씨는 정부의 '사교육 대책'이나 '킬러문항 논란'에 아예 관심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수능이 바뀌어도 학원에서 대비해주니까 학원은 계속 다닐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학원 수강생 이정빈(가명, 19세)씨도 "대치동은 특히 빠르게 대응해주니까 오히려 학원을 그냥 다니는 게 맞다"며 "만약에 '킬러' 문항이 없어지면 '준킬러' 문항이 많아질 테고 학원에서 제공하는 자료에 맞춰서 연습하다 보면 새롭게 변화하는 수능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했다.
쾌적한 공부환경, 풍부한 자료는 기본, 이번 정부 대책과 같은 돌발상황이 터져도 학원만 다니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니 수험생이 학원을 끊을 이유가 없었다.
책가방을 짊어진 학생들이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인근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이다. 양형욱 기자'물수능' 카드 또 꺼내든 정부…효과는 '글쎄'
수능 난이도를 낮춰 사교육을 잡아보겠다는 정부의 선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1학년도 수능은 만점자를 최다 배출한 '역대급 물수능'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이 남긴 "수험생들이 과외를 통해 어려운 문제 풀이에 집착하기보다 교과서의 기본 원리를 숙지하고 현실에 응용하는 능력을 키우는 쪽으로 수험 준비를 하는 편이 고득점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발언은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지적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2014년에는 정부가 '사교육 경감 및 공교육 정상화 대책'으로 9대 중점 과제를 발표했다. 2013년 초·중·고등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23만 9천 원)가 1년 만에 평균 3천 원이나 올랐다며, 정부가 사교육 시장 관리에 나선 것이다.
당시에도 정부는 사교육 수요가 높은 영어영역은 EBS 수능 연계 교재의 어휘수를 조정하고, 난이도를 낮추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교육 시장은 단 한 번도 꺾임없이 꾸준히 팽창해, 올해도 사교육비 규모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교육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41만 원으로 전년(2021년)보다 11.8%나 늘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사교육비 경감 대책과 사교육 카르텔 근절을 위한 대책과 수능 '킬러문항' 공개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정부가 관련 대책을 시행할 때마다 학원가는 발 빠른 대응에 나서니 단순히 수능 난이도를 바꾸는 '물수능' 전략은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사교육 업계에서 20년 넘게 종사한 학원 관계자 A씨는 "사교육은 항상 빛나는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며 "학원은 생존하기 위해 정부에 맞춰 변화하고 틈새를 공략하고 활로를 찾는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사교육 특구인 강남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상위권 대학에 대거 진학하는 현실에서 '사교육 쏠림 현상'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분석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따르면, 최근 4년(2019~2022년) 간 의과대학 정시 전형 합격자 중 강남3구(강남구·서초구·송파구) 출신은 평균 21.87%에 달한다.
한국교원대학교 김성천 교육정책학과 교수는 "의대 쏠림 사태처럼 대학 서열화와 학벌주의가 여전히 견고하다보니 '결국 믿을 것은 입시성적'이라는 인식이 계속 존재해 학생들이 사교육을 찾게 된다"며 "이런 현상이 이어진다면 사교육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교육 관련 대책이 매번 실패하다 보니 정책적 효능감이 떨어졌고 아예 정부 정책으로 상황이 변할 것이라고 믿지도 않는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오히려 '공포 마케팅' 조성…단기 대책 버려야 입시문화 바뀐다
특히 전문가들은 이번 정부 발표로 대학 입시에 갑작스러운 변수가 생기면서 오히려 학원들이 수험생들의 불안함을 이용하는 '공포 마케팅'을 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번 정부 발표가 오히려 사교육을 부추기는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는 분석이다.
가톨릭대학교 성기선 교직과 교수는 "지난 40년 동안 사교육비를 경감시키려고 하는 어떤 정책도 뚜렷한 효과가 없었다"며 "지금처럼 사교육비를 경감시키려고 대책을 마련하는 순간 사교육이 증가하는 이른바 '사교육의 역설'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고교·대학 서열화 등 입시 경쟁을 부추기는 문화를 개선하는 등 정부가 근본적인 사교육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특히 사교육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능 난이도를 낮춘다며 정작 자사고·특목고를 존치하겠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대응에 비판이 쏟아진다.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이형빈 연구원은 "정부가 국가교육위원회를 통해 10년을 내다보는 큰 그림을 국민적 합의 하에 제시해야 하는데 교육개혁을 단기적인 시야에서 접근해 매우 유감"이라며 "사교육을 유발하는 원인인 고교 서열화, 대학 서열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어서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사고와 특목고의 폐해에 대해서 70% 이상의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다"며 "지난 10년 간 과도한 입시경쟁, 조기 사교육 등 폐해가 드러난 만큼 자사고와 특목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