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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르포]"울면서 알파벳 써요"…4살배기도 몰아치는 사교육風 (계속) |
"옆 학원에서는 원어민 선생님이 4살 아이 손을 잡고 알파벳 트레이싱(따라 쓰기)만 하루 종일 한다고 하더라고요. 애기들이잖아요, 4세 아이들은 악력이 없으니까 손목을 잡고 트레이싱 연습을 10번씩 울면서, 울면서 한대요"
마냥 뛰어놀아야 할 나이라고만 생각했던 4살배기가, 하루 종일 앉아 한글도 아닌 영어 공부를 강제로 한다니. 상상도 해보지 못한 현실이었다.
4살배기도 울면서 알파벳 억지로 쓰는 '영어유치원' 호황
지난 23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영어유치원을 찾았다. 6살 아이가 있는데 영어유치원을 보낼 때가 된 것 같다며 상담을 요청했다. 국제학교로 가게 된 아이가 있어서 마침 자리가 딱 하나 났다며, 얼른 오셔야 자리를 '킵'할 수 있다고 하니 단숨에 달려갈 수밖에.
상담에서는 충격적인 말들이 이어졌다. 내 아이가 여기서는 '부진아'였다. 유치원 관계자는 "4살 때부터 영어유치원을 다니는 친구들이 많아서 그 아이들은 영어를 수월하게 한다"며 "6살 하반기에 보내시는 거니, 와서 아이가 다른 친구들보다 못하니까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친구들 진도를 따라 잡으려면, 나머지 공부를 조금 시키셔야 한다"고 말했다. 원어민 과외 선생님을 붙여서, 유치원 수업이 끝나고도 따로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까지 시켜야 하냐고 놀라서 묻자, 유치원 관계자는 "더 유명한 영어유치원의 경우에는 레벨테스트를 통과해서 입학시키려고, 두세 달씩 원어민 과외 선생님 붙여서 하루 종일 공부시키기도 한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분명 유치원 관계자는 "우리 유치원은 '학습형' 영어유치원이 아니라 '놀이'를 접목한 '융합형' 영어유치원"이라며 비교적 널널한 유치원인 것처럼 소개했지만, 실제 살펴본 유치원 커리큘럼은 6살 아이들이 소화하기에 너무도 버거워 보였다. 쉬는 시간은 고작 10분, 시간표는 9시 30분부터 3시까지 문법, 글쓰기, 수학, 과학, 단어 수업으로 빼곡했다. 6살 아이들이 벌써 미국 초등학교 1~3학년이 쓰는 교재로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한 학기에 쓰이는 교재값만 60만 원. 입학비는 40만 원이었다. 한 달 유치원비는 셔틀버스 비용 등을 합쳐서 약 170만 원. 처음 입학할 때 무려 270만 원을 한 번에 내야한다는 소리다. 최저임금은 물론이거니와, 보통의 직장인 한 달 월급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이 돈을 누가, 어떻게 내고 다니나 싶지만 이마저도 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대치동의 한 영어유치원 홈페이지에는 "입학을 희망하시는 학부모님께서는 신청서를 제출해달라"면서 "제출해주신 분들을 대상으로 해당 레벨에 '티오가 생길 경우' 테스트 일정 문자가 발송된다"는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초등학생이 벌써 의대 준비를? 성행하는 '초등의대반'
지난 26일, 정부가 공교육을 무너뜨리는 사교육 카르텔을 뿌리 뽑겠다며 '사교육 경감 대책'을 발표하고 나섰다. 사교육의 시발점인 영어 유치원부터 초등 의대반까지 단속하겠다고 나섰지만, 유초등 사교육 시장에 직접 뛰어들어보니 단속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해당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민소운 기자대치동 학원가를 걷다보니 곳곳에 '초등의대반' 간판을 내건 학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한 곳을 찾아,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라며 '우리 아이를 의대에 보내고 싶다'고 상담을 받아봤다. 학원 관계자는 이런 학부모들이 익숙한 듯, "어머님도 집안 쪽에 의사가 있으신 거죠?"라며 자연스레 물었다. 없다고 대답하니 괜히 머쓱해졌다.
곧이어 학원 관계자는 아이의 학습 상황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학원은 안 보내고, 수학 과외만 시키고 있다고 대답하니 "그럼 아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면서 "지금은 실험 과학도 시키고, 예체능도 시키고 이것저것 전부 잡다하게 경험하게 해줘야 하는 거"라며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순간 '내가 잘못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면서 '초등의대반'에 다니는 초등학생들의 현실을 말해줬다. 학원 관계자는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인데 수1 공부하는 친구도 있다"면서 "초등학교 2학년, 3학년부터 달려가는 엄마들이 있는데 그때는 이제 달려가는 게 맞다, 그 시기부터는 공부밖에, 공부밖에 할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학원 관계자는 또 "애들 숙제 챙겨야 한다, 실수로 틀린 것과 몰라서 틀린 것을 어머님들이 구분해서 체크하고 학원을 보내야 한다"면서 "그냥 학원에 맡기고 좀 게으르게 하시는 어머님들이 계시는데, 그러면 힘들어진다"고 학부모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초등의대반'에 들어가고자 하는 아이들은 차고 넘치지만, 원한다고 다 '입반'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대반 '입반'의 선은 높디 높았다. 입학 테스트를 보고, 실력이 안 되면 학원을 다닐 수 없다. 학원 관계자는 "우리도 돈 받고 하는 건데, 못하는 아이가 들어오면 선생님도 괴롭고 아이도 괴롭다"고 솔직히 얘기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이처럼 영어유치원, 초등의대반이 성행하는 등 유초등 사교육 시장이 날로 커져간다는 건 통계가 증명한다. 실제로 지난해 사교육비 증가율은 초등학교가 3.4%(37만 2천원)으로 가장 높았고, 중학교(11.8%)와 고등학교(9.7%)가 그 뒤를 이었다.
한밭대 남기곤 경제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는 청소년이 사교육에 참여하는 경향 자체가 적을 뿐만 아니라, 주로 학업성적이 뒤처져 있는 학생들이 이를 보충하기 위한 '치료 전략' 차원에서 활용하고 있다"면서 "반면 한국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성적을 더 높이기 위한 '강화 전략' 차원에서 사교육 참여가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학부모 '불안 심리' 노리는 사교육계 '공포 마케팅'
정부가 내놓은 사교육 경감 대책은 정작 사교육 업계에서는 학부모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해준 '호재'나 다름없다.
초,중,고등학생 3명의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 신모(45)씨는 요새처럼 사교육에 열을 올린 적이 없다고 전했다. 신씨는 "(대통령과 정부의 교육 관련 발언들이 시작되자마자) 학원 설명회들이 수도 없이 늘어났고, 내가 이렇게까지 설명회를 많이 다니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7일 취재진이 찾은 초·중·고등학생 학부모 대상 입시설명회에도 학부모 50여 명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자리가 부족해 의자를 추가로 배치해 앉아야 할 정도. 설명회는 2시간이 넘게 진행됐지만, 학부모들은 지친 기색 없이 입시전문가의 말에 귀 기울이며 쉴 새 없이 입시 전략을 받아 적었다.
설명회를 진행하던 입시전문가는 "입시(정책)는 유지가 되면 안 된다"면서 "입시는 계속 바뀌어야 나 같은 사람이 먹고 살 수가 있다. 입시가 매일매일 바뀌면 좋겠다"고 뼈있는 농담을 건넸다.
그러면서 "(교육 정책이 바뀌지 않고) 입시가 계속 유지가 되면 학부모들이 나 같은 전문적인 강사한테 설명을 듣는 게 아니라 옆집 학부모한테 자꾸 묻는다"고 덧붙였다.
광주교대 박남기 교육학과 교수는 "사교육 시장은 생존력이 강하다"면서 "학부모가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해 그 부분을 파고든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제도가 바뀌면 미래가 불확실해지지 않냐, 그 불확실한 미래를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학부모들은 그 불확실성을 대비해주겠다고 이야기 하는 사교육 기관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라며 "이런 정부 정책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오히려 사교육을 강화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저출생'까지 부추기는 사교육비 부담…전면 재검토 必
연합뉴스하지만 막상 학부모가 되면 내 아이를 마냥 놔둘 수 만은 없어, 결국은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게 된다. 서울 성동구에 사는 학부모 정모(42)씨는 "중2 아이한테 한 달에 학원비만 100만 원이 드는데, 내가 버는 수입이 많지 않으니까 맞벌이지만 내 수입은 전부 자녀 교육에 쓴다고 보면 된다"면서 "나는 그나마 최소한의, 정말 기본적인 것만 하고 있는 건데 애가 둘 이상인 집은 부담이 엄청날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대 성기선 교육학과 교수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의 경우, 영어유치원 같은 것들이 (학부모들 간의) 공포감, 경쟁 의식을 조장한다"면서 "요즘 자녀가 적고 '소황제 증후군'처럼 모든 집안에서 '아이 한 명을 더 잘 키워보겠다'는 욕심이 과하게 작용하다 보니 사교육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교육비 부담에 마침내 아이 낳기조차 포기하는 이들도 많다. 정씨 또한 "내 남동생도 결혼을 했는데 아이를 낳지 않고 있다"면서 "맞벌이어도 경제적으로 (사교육비가) 너무 부담이 되고, 만약 아기를 낳게 되면 교육비 지출을 안 할 수가 없으니 아예 낳지 않기로 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구본창 정책대안연구소장도 "대대손손으로 잘 살거나, 본인이 전문직으로 잘 사는 경우가 아니면 사교육비 감당이 힘들지 않냐, 그러니까 아이를 안 낳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의 사교육 경감 대책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성 교수는 "영어 유치원 같은 걸 금지해야 한다. 그런 것들에 대한 규제가 없이 가버리니 사교육을 안 할 수가 없는 구조가 돼 버린다"면서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단계에서 어떻게 사교육이 이뤄지는지 잘 살피고 차제에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