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동취재단▶ 글 싣는 순서 |
①[르포]"울면서 알파벳 써요"…4살배기도 몰아치는 사교육風 ②[르포]물수능도 '족집게 예측'…학원가는 요지부동 ③80% 학생들이 말한다 "'킬러문항'? 관심도 없어요" (계속) |
"저희 학교는 상위권 친구 몇몇 아니면 그런 이슈는 관심 없기도 해요"
전남 보성군의 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인 김모군에게 최근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 배제' 논란 얘기를 꺼내자 보인 반응이다. 김군은 "지방과 수도권의 교육 격차를 그런 (킬러문항 배제 같은) 지엽적인 부분을 건드려서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지방 학생들의 고민은 '킬러문항'보다는 '고교학점제'에 기울었다. 애초 지방에서는 서울 상위권 대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성적이 등락을 좌우하는 정시 전형보다 대입 수시 학생부종합전형의 문을 두드리기 마련이다.
김군은 "지방 일반고 학생들은 저희 안에서도 높은 등급을 가져가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며 "사람 수도 적고 고교학점제 시행으로 과목당 학생 수도 엄청 적어지면 대입에 불리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킬러문항 삭제가 근본 대책?" 대학 서열화·노동시장 개편부터 얘기해야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28일 오전 경기 고양시 EBS 본사 이러닝 스튜디오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황진환 기자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지적 아래 수능에서의 킬러문항 논란이 불거지자 지난 26일 교육부는 킬러문항 출제 배제 등을 담은 '사교육비 경감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킬러문항 배제가 사교육 문제 해법의 대표주자로 충분할까. 대한민국의 대학 입시 체제와 대학 서열화, 노동시장의 임금·근로조건, 저출생 현상 등과 복잡하게 맞물려 있는 데다, 공교육 개선 방안 없이는 사교육 문제 해결이 어려운 가운데 이번 정부 대책들은 여전히 근본 해법과는 거리가 멀다.
최상위권은 킬러문항 때문에 사교육에 기대는 경우가 많지만, 애초 중위권 이하는 킬러문항까지 모두 맞히기 위해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받지 않는다. 킬러문항을 '핀셋' 제거해서 정부 의도대로 정책이 굴러가더라도, 서울 강남 학원가 사교육의 세례를 받는 일부 최상위권 학생들의 사교육비는 낮출 수 있겠지만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먼 나라 얘기다.
정부가 진심으로 사교육비를 경감하려면 한발 더 나아가 수능을 포함한 대입 개편의 문제를 큰 틀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남 보성군의 고등학교에서 3학년 진학지도를 맡은 강장원 교사는 "(킬러문항 배제가) 공교육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서도 "킬러문항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고, 수능의 입시 기능을 줄이지 않는 이상 쉬워도 문제이고 어려워도 문제라 논란은 끊임없이 생길 것"이라고 꼬집었다.
연합뉴스'킬러문항' 논란이 와닿지 않는 것은 비단 지역 학생들만의 일이 아니다. 인천의 한 특성화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정소영 교사는 "특성화고 학생들은 아무래도 대입보다는 취업에 더 관심이 많다"며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졸업하고 갈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가 있느냐, 안전한 일자리, 최저임금 등"이라고 말했다.
정 교사는 "수업시간에 승강기 기능사 자격증을 준비 중인 한 학생이 얼마 전 20대 노동자가 혼자 엘리베이터 점검하다가 추락해 사망한 기사를 보고 와서 엘리베이터 점검회사는 취직하지 말아야 하냐고 물었다"며 "특성화고 자체는 학생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학교인데 안전한 양질의 일자리와 연결되지 않으면 학생들이 올 이유가 없다. 학생 모집도 어려운 상황인데 지금 벌어지는 논란이 조금 다른 세계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특성화고 학생들이) 그림자처럼 있는데, 대학은 '꼭 가야만 하는 곳'이 아니고 대학 교육을 선택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이 있다. 이런 학생들을 위한 정책에는 정부 부처나 정치권의 관심이 많이 떨어지는 게 좀 속상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특성화고 1학년 학생인 노한비양은 "과별로 실습실이 잘돼있어서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고 자격증을 따서 취업하자는 생각으로 이 학교에 왔다"면서도 "주변에서 졸업하자마자 취업하기보다 대학에 다닌 후에 직업을 가지면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조언을 들어 고민이 많다"고 털어놨다.
노양을 지도하는 정 교사는 "대학 서열화와 차별적인 노동환경을 고치지 않으면 사교육 경감은 어려울 것"이라며 "어떤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해도 자기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 생활이 보장될 수 있어야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짚었다.
"모순된 정책으로 혼란만 유발…문제는 '서열화', '공교육 부실'"
연합뉴스현 정부가 초래한 교육 정책의 혼란과 '소수 정예' 학생 맞춤형 대응은 비단 '킬러문항'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율형사립고(자사고)·외국어고(외고) 존치를 포함한 고교체계 개편은 현 정부 출범 후 급선회한 교육정책 중 하나다. 앞서 문재인 정부는 자사고·외고·국제고를 2025년에 일괄 일반고로 전환한다는 전제 아래 고교학점제 도입 등 주요 정책을 짰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자사고·외고·국제고를 존치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고1 공통과목만 상대평가를 유지하면 공통과목의 입시 영향력이 과도해져서 수험생의 학습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전문가들은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될 때 학생들이 성적이 잘 나오는 과목만이 아니라 실제로 원하는 과목을 수강하게 하려면 모든 과목에서 성취평가제, 즉 절대평가를 해야 한다고 지적해 왔다.
경기도교육연구원 교육연구부 남미자 연구위원은 "(고교 다양화 정책은) 모든 학생이 각자의 다양성에 맞게 모든 교육 과정을 선택하지 않고 성적대로 선택할 것"이라며 "결국 상위권 학생들에게 선택지를 더 많이 주는 것이지, 상위권이 아닌 학생들에게는 사실 선택지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 교육위원은 "(현 교육정책은) 어떻게 하면 공정한 평가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학교와 교육이 경쟁의 장은 아니어야 하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초중등 교육을 이수한 이후에 사회에 나와서 건강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공교육의 궁극적인 지향이고 목적일 텐데, (지금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을 많이 길러낼 것인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까 배제되는 학생들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학생들에게 사실은 공교육이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류영주 기자따라서 전문가들은 사교육을 완화하려면 '대학 서열'과 '소득 격차'로 이어지는 구조적 요인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1세대 일타 강사로 현재는 교육평론가로 활동 중인 이범씨는 "한국 사교육의 특이점은 상위권으로 갈수록 사교육비 지출이 커진다. 정책목표를 사교육 경감으로 잡는다면 논리적으로 상위권이 겪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펴는 게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면서도 "근본적인 출생률이 떨어지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 사회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평론가는 "사실 복지 확대나 노동시장의 변화를 통해서 사회적 격차를 줄이는 게 굉장히 어렵다. 그나마 해볼 만한 게 대학 평준화"라며 "정부 예산의 1% 정도인 6조 원 정도를 투자해 대학 간의 재정 격차를 줄이기 위한 상향 평준화하는 방향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을 지낸 가톨릭대학교 성기선 교직과 교수는 "(교육부 정책이)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면서 자사고·외고·국제고를 존치하는 게 초·중학교 사교육비는 오히려 증폭시키니까 그 정책의 진정성이나 일관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성 교수는 "사실은 공교육에서 챙겨야 할 부분은 오히려 중하위권의 학생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어떻게 지원할 건가"라며 "공교육은 국민 누구에게나 보편적이고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지금의 공교육 정책은 오히려 계층 간의 교육 기회를 차별화하고 교육 격차를 더 늘리는 구조로 가고 있기 때문에 교육정의라든지 교육평등, 교육공정 측면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크다"고 비판했다.
이어 "국가가 해야 할 굉장히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는 교육을 통한 사회적 평등의 실현"이라며 "교육을 통해서 누구나 자기의 진로와 적성과 능력에 따라서 삶의 기회를 획득할 수 있는 공정한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교육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