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분단에 이어 전쟁까지 치른 남북이 미중간의 데탕트 흐름에 자극받아 70년대에 들어 돌연 대화를 시작했다. 남북 실세의 평양과 서울 방문을 거쳐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채택하기에 이른 것이다.
통일부가 6일 공개한 남북회담문서 2권(1971년 11월-1979년 2월)은 7.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하기 위한 남북의 비밀 접촉 과정을 잘 보여준다.
남북이 냉전 속에 전쟁을 치른 뒤 체제 경쟁을 벌이던 때라 상호방문과 대화를 위한 매뉴얼도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이 때 처음 시작된 신변안전보장 각서 등 상호방문 절차와 회담진행 매뉴얼은 이후의 남북관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홍진 한적 남북회담사무국 회담운영부장이 먼저 72년 3월 28일부터 31일까지 평양을 방문했고, 이어 김덕현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직속 책임지도원이 72년 4월 19일부터 4월 21일 서울을 방문했다.
연합뉴스정홍진과 김덕현의 교차방문 결과로 박정희 정권의 실세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당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의 청와대 습격 시도사건, 1968년 10월 30일 북한의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사건 등의 여파로 남북 간에는 극도의 긴장이 조성되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이 서로 적지를 방문해야하는 만큼 한편으로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후락 부장은 이후 후일담을 통해 당시 평양을 방문할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청산가리를 지참해갔음을 밝힐 정도였다.
이번 공개된 사료를 보면 이후락 부장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솔직히 말해서 내가 평양을 오는데 '가야한다, 가지 말아야 한다'는 여러 가지 의견이 많았습니다. 내가 평양가기를 결심한 것은 관광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고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시발이 되지 않겠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친한 친구도 말렸지만 '김영주 선생의 정치적 역량을 믿고 이야기를 하면 될 것 아니냐'하고 왔습니다"라고 밝힌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락 부장은 재차 김영주 부장에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안 오리라 생각했지요?"라고 물으며, 평양방문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을 강조했다.
친한 친구도 말렸다는 위험한 평양방문에서 이후락 부장의 신변안전보장은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 명의의 각서로 제시됐다.
1972년 11월 4일 평양에서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문에 서명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과 김영주 북한 노동장 조직지도부장. 통일부 제공북한은 그 해 4월 19일부터 4월 21일까지 김덕현 책임지도원을 서울로 파견할 때 함께 보낸 신임장도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명의의 신임장을 분명히 했다.
반면 이후락 부장의 평양 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이후 서울을 방문할 때의 신변안전보장각서는 좀 차이가 난다.
북한의 김덕현 지도원은 5월 26일 남북직통전화를 통한 박성철 부주석의 서울 방문 관련 실무협의에서 "신변보장각서 서명의 공식직함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은 내가 잘못 전달했는데 종전대로 그냥 중앙정보부장으로 정정해 주십시오"라고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북한이 박 부수상에 대한 신변안전보장각서의 직함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으로 요구했다가 이후 '대한민국'을 빼 달라고 수정 요구한 것이다.
이에 남측이 "꼭 그렇게 고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묻자, 북측은 "지난 번에 우리 측도 귀측 요구대로 다 들어주었으니 우리 측 요구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답변했다.
'대한민국'이 표기되면 신변안전보장의 주체가 보다 명확해지는 효과가 있겠지만,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지향한다는 북한이 논리 상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인정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후락과 박성철의 교차방문으로 남북은 결국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7.4 남북공동성명 문서에서는 '대한민국'과 '조선노동당'은 물론 '중앙정보부장'과 '조직지도부장'이라는 직함도 사라진다.
남북공동성명의 문서를 단순히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로만 서명한 것이다.
남북이 처음으로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며 채택한 첫 합의 문서이지만, 그렇다고 국가로 인정할 수 없는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를 반영해 기관이나 직함 없이 이후락과 김영주 명의의 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