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CBS 라디오 <오뜨밀 라이브> FM 98.1 (20:05~21:00)
■ 진행 : 채선아 아나운서
■ 대담 : 박수정 PD, 조석영 PD
◇ 채선아> 지금 이 순간 핫한 해외 뉴스, 중간 유통 과정 싹 빼고 산지 직송으로 전해드립니다. 여행은 걸어서, 외신은 앉아서. '앉아서 세계 속으로' 시간입니다.
◆ 박수정> 안녕하세요. 매주 외신 전해드리는 박수정입니다. 오늘은 광복절에 개봉한 영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아마 기다리고 계셨던 분들 많을 것 같은데요. 우리 옆 나라 일본에서는 이 영화가 개봉이 금지될 수준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 채선아> 일본에서는 광복절이 패전일이잖아요. 그러니까 패전하게 된 원인인 원자폭탄을 만든 사람이 오펜하이머다보니, 일본인 입장에서는 이 영화가 불편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 박수정> 맞아요. 이코노미스트에서 '일본에서 영화 <오펜하이머>가 공포를 자아내고 있다'라는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썼습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영화 시장인 일본에서 개봉하지 못할 수도 있다"라고 적혀 있는데요. 이렇게까지 영화 <오펜하이머>가 갈등의 중심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바벤하이머' 트위터 사건인데요. <워싱턴 포스트>에서 이런 기사를 냈어요. "워너브라더스가 바벤하이머 밈에 동참했고, 일본은 이걸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벤하이머가 뭐냐면, 미국에서 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가 같은 날 개봉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두 영화가 서로 상반된 성격을 가졌어요. <바비>는 핑크색이고 밝고 유쾌한 코미디인데, <오펜하이머>는 좀 어둡고 실제 역사를 심각하게 다룬 얘기잖아요. 그런데 이 상반된 두 영화를, 같은 날 감상하고 오는 게 유행이 된 거예요. 심지어 영화 <바비>의 감독과 주연 배우가 직접 '우리가 <오펜하이머>를 봤다'고 인증샷을 올렸고, 그게 유행이 돼서 네티즌들이 '나도 가서 인증샷 올려야지' 하면서 이른바 '바벤하이머'라는 트렌드가 미국의 극장가를 살렸다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두 영화의 흥행을 이끈 일등 공신이 됐습니다.
◇ 채선아> 다들 '#바벤하이머' 해시태그로 게시물을 올리고 싶은 거네요.
◆ 박수정> 그렇죠. 그런데 영화 보고 왔다고 인증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네티즌들이 온라인상에서 이 두 영화의 이미지를 합성하면서 이른바 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영화 <바비> 스틸컷에서 주인공 바비와 함께 핑크색 차를 타고 가고 있는 게 원래 <바비> 영화에 나오는 켄이 아니라 오펜하이머가 앉아있다거나, 아니면 그 뒤에서 원자폭탄이 터지고 있는 건데요. 어떤 네티즌은 아예 AI를 활용해서 바벤하이머라는 영화를 만들었어요. 버섯모양 구름이 원자폭탄의 상징이잖아요. 그 버섯 모양 구름에 영화 <바비>의 색깔인 핑크색을 입힌 거죠.
◇ 채선아> 영화를 가지고 재밌게 소비하는 모습인 건데,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홍색 원자폭탄 구름? 이걸로 놀아도 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조석영> '원자폭탄이 장난이야?' 이렇게 느낄 수 있죠.
◆ 박수정> 맞습니다. '원자폭탄을 장난으로 소비하는 거냐' '불편하다'라는 반응이 나오는데요. 특히 일본에서는 학교에서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으로 인한 피해국'이라고 배우기 때문에, 원래 바벤하이머 유행에 대해서도 불편한 마음은 있었겠죠. 그런데 그냥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활동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크진 않았어요. 문제는 여기서 불씨가 타오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집니다. 이 '바벤하이머' 밈의 유행이 영화 흥행에 도움이 되다보니 영화 제작사가 이걸 장려하기 시작한 거에요.
◆ 조석영> 공식적인 홍보에 활용됐나보네요.
◆ 박수정> 영화 <바비>의 팬이 오펜하이머의 어깨 위에 바비가 올라타 있고, 둘이서 원자폭탄이 터진 불길 사이를 걸어가는 이미지를 올렸어요. 그런데 이 이미지에 영화 <바비>의 공식 트위터 계정이 "It's going to be a summer to remember(정말 기억에 남는 여름이 될거야)" 이렇게 하트 이모지를 달아서 답장을 남겼어요. 이게 장난스러운 말투인데, 일본인들이 느끼기에는 공격적일 수가 있죠.
◆ 조석영> 일본인에게 여름, 특히 8월은 원자폭탄이 투하돼서 몇 만명이 피해를 입은 달이거든요.
◆ 박수정> 그런데 '기억에 남는 여름이 될 거야' 이런 문구가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후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거의 온라인 전쟁이 벌어집니다. 일본 네티즌들이 '바벤하이머'라는 밈을 소비하지 말아달라면서 '#노바벤하이머'라는 태그를 만들어서 이게 실시간 트렌드에 올라오기도 했고요. 어떤 일본 네티즌들은 '미국 사람들도 똑같은 마음 느껴봐라'면서 9.11 테러 사진에 핑크색 바비 컬러를 넣어서 '어떻게 생각해? 너네 기분은 어떻니?' 라며 미국의 비극을 조롱하기도 했고요. 그러자 또 미국 네티즌들은 '야, 너네 전쟁 피해자인 척하지 마. 일본이 먼저 전쟁 일으키지 않았냐'라고 서로 공격하면서 싸움이 엄청나게 거세졌어요.
◇ 채선아> 서로의 국민적 트라우마를 파고들면서 상처를 내고 있는 상황인데, 사실 영화 흥행 때문에 이 밈의 활용에 동참했던 제작사는 지금 떨고 있겠어요.
◆ 박수정> 일본의 영화 시장이 굉장히 크기도 하고 이런 갈등이 여러모로 부담이 됐는지 <바비>의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 측에서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일단 워너브라더스 일본 지사에서 본사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다고 해요. 그 항의에 대해 '우리가 사과한다'라면서 '사려 깊지 못한 포스팅에 죄송하다'고 했는데요. 현재까지 영화 <오펜하이머>는 다른 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개봉 날짜를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바벤하이머'라는 밈에서 출발해 일본에서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까지 살펴봤는데, 참 어려운 문제 같아요. 전쟁에서 누가 순전한 피해국인가, 또 원자 폭탄은 정당했는가. (원폭) 피해자가 엄연히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걸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가 더 잔인하다는 의견도 있거든요.
◆ 조석영> 그런데 전쟁 범죄를 일으킨 사람들에 대한 죄를 묻는 것과 원폭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의 피해를 살피는 게, 함께 할 수 없는 일은 아닌 것 같거든요. 원폭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이 전쟁 일으킨 게 아니잖아요. 거기에 조선인들도 몇 만 명 있었다는 얘길 저희 방송에서도 전해드린 적 있구요. 또 한국으로 치면 베트남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보니 영화를 통해 이런 문제를 직시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 채선아> 오펜하이머도 딜레마를 겪잖아요. 자신이 개발한 원자폭탄이 전쟁을 억제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대량살상무기가 돼서 민간인을 해치니까요. 그런 지점까지 해서 좀 토론해볼 거리가 있는 영화고, 이슈가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