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족 2명이 숨지고 3세 아동이 중상을 입은 부산진구 아파트 화재 현장. 정혜린 기자 지난 주말 화재로 일가족이 참변을 당한 부산의 한 아파트는 대피 시설뿐만 아니라 완강기 등 기본적인 피난기구조차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숨진 일가족이 화마를 피해 발코니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기본적인 소방시설만 갖췄더라도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과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12일 부산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지난 주말 화재로 일가족 2명이 숨지고 3세 아동이 중상을 입은 부산진구 개금동 A아파트에는 완강기가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완강기는 건물에 불이 났을 때 건물 외부로 천천히 하강할 수 있는 피난 기구로, 주로 창문이나 발코니 등에 설치해 외벽을 통해 지상으로 탈출하는 데 쓰인다. 10층 이하의 중·저층일수록 재난 상황에서 큰 역할을 하는 시설로 꼽힌다.
소방당국은 1992년 7월 개정한 소방법 시행령에 따라 3층 이상 10층 이하 아파트에 완강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정하고 있다. 하지만 불이 난 아파트는 1989년 사업 승인을 받고 1992년 준공해 완강기 설치 의무가 없었다.
이 때문에 불이 난 아파트에 완강기 등 기본적인 피난 시설만 있었더라도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운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숨진 B(40대·남)씨 등은 화재를 피해 발코니에 매달려 있다가 1층으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가 발생한 아파트 외벽이 윗층까지 검게 그을렸다. 정혜린 기자불이 난 아파트에는 완강기뿐만 아니라 경량 칸막이 등 대피 시설도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경량 칸막이는 얇은 합판 등으로 만든 일종의 가벽으로, 작은 충격으로도 벽을 뚫고 옆 세대로 대피할 수 있는 시설이다. 화재 초기 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스프링클러도 설치되지 않았다. 이들 시설 역시 1992년 7월부터 공동주택 설치가 의무로 지정됐다.
관련법이 강화되더라도 기존 시설은 소급 적용되지 않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실제 피난기구 설치 규정은 지난해 12월 시행한 소방청 고시인 피난기구의 화재안전성능기준에 따라 아파트에서는 현재 각 세대에 한 개 이상 피난기구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정하고 있지만, 기존 건물에 대해서는 이를 소급 적용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공동주택은 상업 건물과 달리 개인이 소유하고 생활하는 공간인 만큼, 아파트나 거주자가 자체적으로 소방설비를 갖추지 않는 이상 이를 강제하거나 점검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부산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법을 개정해도 소급 적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이미 준공한 아파트에 뒤늦게 시설을 설치하기도 사실상 불가능해 소급 적용이 현실적으로 어렵기도 하다"며 "결국 관리주체인 세대주나 아파트에서 실정에 맞게 시설을 갖추거나 관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소방방재학과 정두균 교수는 "규정을 강화해도 소급 적용은 하지 않다 보니 (화재 위험이 큰) 노후 아파트일수록 오히려 별도 대피 공간이나 완강기가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며 "소방당국이 관련 홍보를 강화하거나 지자체 차원에서 소방시설 설치를 지원하는 것도 안전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대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9일 A아파트에서는 원인이 확인되지 않은 불이 나 B씨와 B씨의 장모 C(50대·여)씨가 숨지고 B씨의 3세 아들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B씨의 베트남인 아내가 생계를 위해 집을 비운 사이 불이 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