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속에 대학가 원룸 임대료까지 오르면서 하숙집과 기숙사 등 조금 더 저렴한 거주 시설을 찾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24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학교 인근 주민게시판에 하숙 관련 전단지가 붙어 있다. 박종민 기자정부가 내놓은 청년 월세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진 지원 조건으로 헛돌고 있다. 정부는 일정 가격 수준 이하의 주택을 계약해야만 지원을 해주는데, 해당 가격을 맞는 주택을 수도권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주거부담에 허덕이고 있는데도 정작 정부는 예산의 75%를 집행하지 못하고 쌓아 두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8월 청년의 주거 부담을 완화하겠다는 취지로 '청년 월세 지원 사업'을 내놓았다. 부모와 별도로 거주하는 만 19~34세 무주택 청년 중 보증금 5천만원·월세 60만원 이하 주택에 거주하는 조건이다. 여기에 해당되면 매달 월세 20만원을 12개월간 지원하는 사업이다.
청년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택 문제에 도움을 주려는 취지지만 예산을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 이 사업에 예산 800억원 이상이 편성됐으나 실제 지원 액수는 14%에 그친 것이다.
청년 월세 지원 사업이 시들해진 이유는 비현실적인 월세 조건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부동산정보 플랫폼 '다방'을 운영하는 스테이션3이 지난 14일 발표한 자료를 보면, 올해 8월 기준 서울 지역 연립·다세대 원룸의 평균 월세는 69만원(보증금 천만원 기준)이다. 특히 용산구(87만원), 중랑구(79만원), 금천구와 동대문구(76만원) 등 지역의 평균 월세는 청년월세 지원 사업이 지원 조건으로 내건 금액인 60만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여기에다가 청년 중위소득이 60% 이하면서 부모가 사는 원가구 소득이 중위소득의 100% 이하여야 한다는 소득 기준도 통과해야 한다.
대학 진학 때문에 상경해 서대문구 원룸에서 자취 중인 한모씨(25)는 "학교 근처 6평짜리 원룸에서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70만원으로 계약해 살고 있다"며 "청년 월세 지원 사업의 존재를 알았고 지원하고 싶었는데 조건이 안 맞아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방 출신들은 학교나 취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이동해야 하는데 서울에서 집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막막하다"고 털어놓았다.
강서구에서 부동산을 운영 중인 공인중개사 양모씨(56)는 "전세 사기로 난리가 난 이후 월세 수요가 몰리면서 월세 가격이 많이 올랐다"며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서울에서 월세 60만원으로 크기, 위치, 시설 등이 만족스러운 집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비현실적으로 설계된 정부 사업으로 실질적인 혜택을 얻지 못한 청년들은 지자체 월세 지원 사업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대표적으로 '보증금 1억·월세 50만원 이하'이라는 조건을 내건 수원시 청년 월세 지원은 지원 조건(5개월)이 짧고 지원 금액(10만원)도 적지만 정부 사업에서 탈락해 아예 지원을 받지 못할 상황에 놓인 청년들이 대거 몰렸다.
수원시 관계자는 CBS 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2022년에는 100명의 지원 대상을 선정하는 데 750명이 지원했다"며 "정부 사업보다는 자격 기준을 완화하니 지원 대상이 되지 못한 청년들이 많이 신청한다"고 전했다.
'보증금 9천만원·월세 50만원 이하' 주택에 거주하는 청년을 지원하는 평택시의 청년 월세 지원 정책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평택시 관계자에 따르면 평택시 청년 월세 지원 사업은 2021년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 선발 예정 인원(50명)을 뛰어넘는 173명이 신청하고 대상 인원을 늘려달라는 요구가 많아 2022년 100명, 2023년 125명으로 지원 인원을 확대했다.
평택시 관계자는 "사실 지원자들을 보면 보증금이 9천까지 들어가 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수혜 대상을 많이 뽑아주려는 의도로 기준을 크게 잡았다"며 "만족도 조사에서 지원을 계속 해줬으면 좋겠다는 요구가 많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월세 지원사업의 조건을 현실화하는 대신 예산을 깎는 쪽을 택했다.
지난 13일 공개된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내년 청년 월세 지원 사업 예산으로 103억 5천만원을 편성했다. 이는 올해 예산 442억원에서 76.5% 줄어든 것이다.
정부가 정책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이유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예산 삭감에만 급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남대 부동산건설학부 서충원 교수는 "정부에서 나름대로 여러 근거를 갖고 지원 기준을 정해도 막상 시장에 나오면 현실하고는 안 맞을 수 있다"며 "지방은 월세 60만원·보증금 5천만원이라는 조건이 충분할 수 있지만 서울 도심지는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차차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정책을 수정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원대 부동산학과 장희순 교수는 "수도권 지역에 적용하는 월세 금액과 6대광역시, 중소도시는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며 "수도권 대학가 주변이나 샐러리맨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월세 지원 기준을 수정해서 현실성 있게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19일에 노컷비즈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