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편성 과정 흐름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2023년도 정부연구개발예산 현황 분석' 내년도 국가 R&D(연구개발) 예산이 갑작스럽게 재편성되는 과정에서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자문회의) 심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르면 R&D 예산을 짤 때는 자문회의 심의가 필요하다. 이 심의를 위해선 각 분야별 전문위원들이 안건에 대한 심층 분석을 하는데, R&D 예산이 재검토되면서 이 과정이 거의 생략되다시피 했다.
21일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당초 내년도 R&D 예산을 책정하는 과정에서 자문회의 산하 각 전문위원회는 R&D 예산 투자 방향 및 기준을 검토했다. 대통령 직속 기관인 자문회의는 산하에 운영위원회, 특별위원회, 협의회, 전문위원회(전문위)를 둔다. 특히 전문위는 분야별로 10개 위원회(공공우주전문위원회·기초기반전문위원회 등)가 있다.
각 전문위에 소속된 10여명의 전문위원들은 자문회의 심의회의에 상정되는 R&D 안건의 사전 검토 및 자문을 한다. 통상 전문위는 1월부터 R&D 투자 방향 및 기준안을 검토하고 5월 쯤 사업설명회를 연다. 6월에는 이와 관련한 중간 보고 및 최종 보고를 한다.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자문회의 심의를 거쳐 기재부에 넘어가야 해서다.
과학기술기본법 12조의 2(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의 배분·조정)에는 R&D 사업과 예산에 대한 보고를 누가 언제까지 어디에 넘겨야 하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다. 5항에 따르면 과기부장관은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각각 제출한 R&D 사업의 투자우선순위에 대한 의견과 예산요구서 등에 대해 자문회의 심의를 거쳐 그 결과를 6월 30일까지 기재부장관에게 알려야 한다.
실제로 공공우주 전문위는 2월 8일 서면으로 24년도 정부연구연개발 투자방향 및 기준안을 검토했고, 5월 8일~12일에는 사업 설명회를 개최했다. 6월 12일에는 R&D 예산 배분·조정 중간 보고를 했다. 에너지환경 전문위, ICT융합 전문위, 기계소재 전문위, 생명의료 전문위, 기초기반 전문위, 국방 전문위도 비슷한 시기에 사업설명회와 중간보고를 통해 안건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이 R&D 예산안을 재검토 하라고 한 6월 말 이후에는 전문위 회의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8월 18일 하루 만에 기술분야별 전문위원장들이 참석하는 전문위원장 간담회와 민간위원 사전간담회가 열렸을 뿐이다. 8월 21일과 22일 연이틀 동안에는 운영위와 심의회의가 개최돼 안건을 의결했다.
한 전문위원은 "2월과 5월, 6월에 열리는 전문위 회의에는 모두 참석해서 자문을 했는데 갑작스럽게 예산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위원은 "예산이 다 조정된 걸 보면서 '그럼 전문가인 우리가 한 일은 뭐지'라는 얘기들을 했다"면서 "두 달 동안 예산이 깎인다는 소리만 들었지 우리도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랐다"고 전했다. 순서가 뒤바뀐 채 심의회의에서 새로운 R&D 예산안이 의결된 뒤 8월 말쯤에야 과기부가 전문위원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R&D 예산안에 대해 설명을 했다고 한다.
8월에 열린 운영위와 심의회의는 사실상 의결을 위한 회의이기 때문에 재검토안에 대한 심의는 전문위원장 간담회와 민간위원 사전간담회가 전부다. 이마저도 단 하루 동안 열려 형식적인 절차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조승래 의원은 "간담회는 말 그대로 간담회라서 심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서 "엄밀히 따지면 재검토안에 대한 자문회의 심의는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과기부 예산 담당 관계자는 "전문위원들이 사업의 내용이나 규모가 적정한지 의견을 주면 혁신본부에서 예산을 배분·조정한다"면서 "전문위원들이 사업별로 냈던 의견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검토 할 때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심의회의가 끝난 뒤 전문위원들에게 설명한 이유에 대해서는 "전체적 규모와 분야별 달라진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린 것"이라고 말했다.